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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영국의 3단계 전쟁전략은?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1939년 3월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했을 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끝장났다. 비로서 영국은 히틀러에 대한 양보가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알게되었다.39년 봄, 영국 참모본부 위원회가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전쟁 계획을 마련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이 계획은 2개의 전제를 가졌다 : 프랑스군이 전쟁 초...

영국 유화정책에 대한 오해의 뿌리는?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대전략과 전략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우선, 대전략의 지리적 범위가 지구적이라 한다면, 전략의 그것은 대륙적이라 정의할 때,영국의 유화정책은 전략이 아닌, 대전략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비단 유럽의 히틀러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당시 전세계에 걸쳐 존재했던 해가 지지않...

마키아벨리, 폐결핵과 적폐의 공통점은?

[전략] 몰트케가 비스마르크에게 한 말?현명한 군주는 현재의 소요만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요에 대비해야만 하고, 그런 소요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소요를 멀리서 일찍이 감지하면 처방을 구하기가 쉽다. 하지만 가까이 오도록 방치하면 처방을 제때 쓸 수 없게 된다. 그때는 치유할수 없는 질병이 되기 때문이다...

[20년대]프랑스의 독일 압박에 대한 소련의 해석은?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공포는 영혼을 잠식할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도 망치는가? 전간기 스탈린의 소련의 외부세계에 대한 공포는 심각했다. 이 공포를 바탕으로 전간기의 주요 국제문제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소련 정책 결정자들은 심지어 다른 국가들의 행동이 중립적이며 혹은 심지어 소련에 이익에 될 때 조차도, 그들이 소련에 불...

소련 정책에 대한 처칠과 체임벌린의 인식차?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윈스턴 처칠과 네빌 체임벌린>윈스턴 처칠과 네빌 체임벌린은 소련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했다. 처칠이 이른바 현실정책 Realpolitik 의 관점에서 소련 정책을 해석했다면, 네빌 체임벌린은 이데올로기를 중시했다. 1939년 10월, 처칠은 소련 외교정책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의 유명한 진단을 ...

독일-일본-소련 관계와 쐐기 전략?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39년부터 41년 동안, 독일-일본-소련은 적진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주적과 손을 잡는 쐐기전략을 적극 구사했다. 우선, 39년 독일은 소련을 영불 동맹에서 이탈시키려 했다면, 소련은 파시스트 세력인 독일과 일본을 분열시키려 했다.  39년 8월의 독소불가침 조약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음으...

[41년]독소전쟁과 일본의 선택,"북이냐,남이냐?"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1941년 6월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요한 선택에 직면했다. 독일은 일본에게 소련의 시베리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외상 마쓰오카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과 몇달 전에 일본-소련 중립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마쓰오카가 말이다. 소련 공격 주장에 대해서 해군이 강하게 반발...

영국이 히틀러에 대한 예방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히틀러의 독일의 빠른 부상에 대해서, 영국과 프랑스는 36년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3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위기에서 예방전쟁의 기회를 잡았다.그럼에도 프랑스와는 다르게 영국 지도자들은 예방전쟁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 군사력에 대한 분석평가가 영국은 앞으로 몇 년동안 전쟁할 준비가 되지 않...

[20년]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공포의 시작?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공포는 전간기의 개막과 동시에 시작된 것인가?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베르사유 조약에서 승전국 프랑스는 독일의 장래 위협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세력은 프랑스의 강대국 지위를 위협하는 잠정적 존재론적 위협이 되었다. 1920년, 프랑스 정보부는 ...

일본의 대전략? 사카모토 료마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대전략은 지리와 국가전략과 관련하여 두 개의 지적 전통이 존재한다고 한다. 1867년에, 유신의 주역인 사카모토 료마가 강한 해군력을 주장한 국가전략 기초를 위한 8개조의 계획을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에게 바다는 무역과 경제 안보를 위한 원천이며, 침공에 맞선 방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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