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극동정책 요약보기전체보기목록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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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일본은 왜 해상세력이 되지 못했는가?"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해외 침략을 준비했지만,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왜 그들은 바다쪽이 아니라, 한국을 통해 만주 방면의 대륙 침략을 결심하게 된 것인가? 일본의 침략 방면에 대한 전략적 선택에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간섭이라 볼 수 있다. 홍콩을 이미 식민지로 가지고, 양...

"미국의 대-일본 정책의 장기적 연속성은?"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키신저와 트럼프>메이지 일본이 대외 침략의 마수를 처음으로 드러낸 것은 바로 1874년 5월의 타이완 출병 Formosa expedition 이었다. 출병군 사령관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였다. 미국은 일본의 대만 공격을 적극 지원했다. 주일 미국공사 데롱은 본...

[34년] "네빌 체임벌린은 반미, 친일파였는가?"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1934년 영국은 극동에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부상에, 유럽에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의 위협에 직면했다.  당시 영국 재무장관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은 독일의 위협과 일본의 부상에 대한 국방 계획 마련을 요구했다. 재무장관으로 영국 국방비 절감을 위해 고심하던 체임벌린은 극동에서 일본과의 타...

[40년]프랑스 항복과 미국의 아시아 정책?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데이비드 레이놀즈에 따르면,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2번까지만 임기를 맡는다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깨고 3선에 도전한 것은 같은 해 6월의 프랑스 항복에 따른 위기감 때문이었다. 1940년 6월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항복은 일본에게 기회이자 장애물이 되었다. 물론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가진 프랑스...

[32년] 소련과 일본의 전쟁 위기?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1930년대 내내 소련과 일본은 극동에서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이 충돌 중에서 소련에게 가장 위험했던 것은 32년 8월의 위기 상황이었던 것 같다.중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일본 육군 황도파의 대부,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을 역임할 동안(1931-1934)...

중일전쟁기 미국의 극동정책의 핵심은?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이 주제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는 도로시 보르그의 연구이며, 이후 모든 관련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왔다. 말하자면, 보르그 이후의 관련 연구에서 그녀의 책이 인용되지 않았다면, 그 연구는 무시해도 무방할 정도라는 것이다. 성경에 가깝다.보르그, 미국과 1933-1938년의 극동정책 ; 만주사변부터 선전포고없는 중일전쟁...

[41년]영국, 극동을 버리고 소련을 선택하다?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전략 이란, 그리고 전략적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가진 자원의 한계를 고려하여, 목표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41년 후반의 영국의 선택이 전략적 선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극동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영국의 선택은 일본에 대한 유화로 볼 수 없다. 40년의 유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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