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리팩스를 위한 변명? Le monde

핼리팩스를 위한 변명?

우리가 2차대전 다큐나 영화를 통해 접하는 네빌 체임벌린의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유화정책의 전위대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읽어보면, 핼리팩스는 차라리 유화정책과 체임벌린의 가롯 유다였다. 가장 먼저 유화정책에서 저항론으로 변심했고, 체임벌린의 유화에 등을 돌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뮌헨협정을 조율을 위해서 체임벌린은 독일을 두 번 방문했다. 한번은 베르히테스가덴, 다른 한번은 고데스베르크. 

핼리팩스가 결정적으로 변심하고, 히틀러에 대한 저항으로 입장을 바꾼 것은 체임벌린의 고데스베르크 방문 동안이었다.  1938년 9월 22일-23일. 23일에 본국의 핼리팩스가 체임벌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체코 정부가 상당한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평화적 해결을 거부하면, 이는 전쟁을 의미하고 이것이 인류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될 것이라 주장해야 한다고 핼리팩스가 주장했다.1) 

체임벌린은 23일에 런던에 돌아왔고, 9월 24일에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9월 24일
핼리팩스가 체임벌린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영국 외상은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히틀러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않고, 그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궁극적 목표에 대한 자신의 약간의 불확실함을 표시했다. 그 목표는 나치즘의 파괴였다. 나치즘이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확실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수용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

9월 25일
영국 내각회의,
핼리팩스가 강경론을 주장했다. 그는 체코인들에게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3) 
이전까지 핼리팩스는 체임벌린의 정책에 대해 절대 지지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4) 

1) Faber, Munich, 1938, 352.
2) Faber, Munich, 1938, 362.
3)R. J. Q. Adams,British Politics and Foreign Policy, 116.
4) Faber, Munich, 1938, 362.

- 나는 이런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본다.

유화정책 탈출은 지능순이다. ㅎㅎ



덧글

  • 함부르거 2022/07/13 17:35 # 답글

    당시 영국 내각에서 히틀러를 가장 많이 접해 본 사람이니 생각이 달라질 수 있었겠죠.

    제 개인적인 느낌으론 당시 영국 지도부에겐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지 않았나 합니다.윌리엄 샤이러가 지적했듯 '나의 투쟁'만 제대로 읽어 봤어도 히틀러가 팽창을 멈추지 않으리란 것이 자명했는데 말이죠.
  • 파리13구 2022/07/14 09:15 #

    영국 보수주의자들이 대체로 나치즘을 동경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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