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가믈랭와 라인란트 위기? Le monde

모리스 가믈랭와 라인란트 위기?

가믈랭은 전간기의 중요한 시기에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9 February 1931 - 2 September 1939

1936년 3월의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은 여러 역사가들이 나치 체제에 대한 서양의 예방전쟁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해석되어 왔다. 히틀러는 당시의 사건에 대해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살 떨리는 순간”, “만약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격해 왔다면, 우리는 꼬리를 다리사이에 감추고 후퇴했을 것이다.” 1)  

프랑스 정부가 라인란트 위기에서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가믈랭의 주장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정책기조인 군축의 원칙 하에서, 가믈랭은 내각에게, 프랑스군은 서부에서 독일과의 무력 충돌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가지지 않았다고 실토했다고 한다.2) 

사태에 대한 가믈랭의 인식이 프랑스 정부의 대응 결정에 중요했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정면 도전인 라인란트 재무장을 도발하자,  3월 8일 프랑스정부가 가믈랭 프랑스군 참모총장에게, 프랑스군이 라인란트로부터 독일군 침략자들을 격퇴시킬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이에 가믈랭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는 프랑스-소련 조약이 독일의 도발을 야기할 것이라 정부에게 이미 경고한 바 있다는 점을 다시 주지시켰고, 독일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총동원령 선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총동원령 선포만으로 독일이 물러서지 않으면, 전면적 군사행동에 돌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을 전쟁으로 끌어들여야 하고, 벨기에 정부가 자국 영토를 통한 프랑스군의 진격을 허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가 상대해야할 독일군의 힘과 규모에 대해서, 가믈랭은 매우 비현실적인 공포를 조장했다.
가믈랭의 이같은 보고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라인란트에 대한 단독 무력 개입 계획을 포기했고, 협상으로 대처하자는 영국측의 제안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가믈랭은 라인란트에 대한 독일 점령군 규모가 265,000명이라고 추정했지만, 실제로 히틀러가 동원한 것은 독일군 22,000에,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이 비교적 소규모의 무력을 동원, 히틀러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안보질서의 초석인 라인란트 재무장 금지 규정을 파괴했던 것이었다.

1) Robert G. Kaufman (2008) “To Balance or To Bandwagon?”,428. ; Bullock, Hitler, 345.
2) Robert Boyce, Esmonde M. Robertson (eds.), Paths to War, 136.

라인란트 위기에서 프랑스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것이 프랑스의 독일 견제를 위한 동유럽 소협상 체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동유럽 국가들이 독일의 침략에 대한 저항 보다는 편승의 유혹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루마니아 외상 니콜라에 티투레스쿠, “3월 7일에 귀국이 스스로를 지키지도 못했는데, 귀국이 어떻게 침략자에 맞서 우리를 돕겠는가?” 3) 

3)Kissinger, Diplomacy,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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