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사변과 영국해군? Le monde

1931년 만주사변과 영국해군?

1930년대초에 영국 엘리트들은 대전략을 구상하면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해외제국과 유럽 본토에서의 국익을 지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해외제국과 유럽 본토 둘 다 지킬 수 없었고, 선택이 불가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안보를 위해 보다 중시된 것은 전자였다.]

해외제국 방어의 문제에서 전간기 동안 영국 엘리트를 괴롭힌 것이 극동의 영국해군력 보존이었다. 영국 내각은 1921년에 싱가포르의 해군기지 건설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1932년까지 1단계 공사완료를 위한 예산배정을 내각이 승인하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가 되서야 일본 침략이 영국 내각의 뜨거운 토론 주제로 부상했고,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같은 해외제국 방어를 위해 자원을 투입할 여력이 있는지가 토론 주제가 되었다. 해군성은 극동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책임"이며, 전시 계획과 자원 배분에서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무부도 극동에서의 영국의 존재감 증가에 열의가 있었고, 일본에 대한 유화적 태도가 일본의 침략을 부추길 뿐이라 주장했다.

- Charles Kupchan, The Vulnerability of Empire, 144-145.

- 1930년대초 영국의 대전략 논쟁에서 만주사변을 계기로 해외제국파가 논쟁을 주도했겠지만,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히틀러 독일의 부상으로 유럽대륙의 안보가 위협받으면서, 영국 안보를 위한 최선의 자원 투자가 유럽인지 아니면 해외제국인지의 논쟁이 복잡해지게 되었다. 유럽과 해외제국 모두를 지킬 수 없었고, 전략적 선택과 우선순위 배정이 불가피했다. 영국의 유화정책은 이같은 대전략 논쟁의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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