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정책과 일본
- 1930년대 영국은 일본과의 우호를 원했지만...
영국의 유화정책을 영독 관계를 넘어선 국제관계의 시각에서 봐야하는 이유는 다음 한문단으로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코렐리 바넷 Correlli Barnett 의 지적처럼, 1930년대 영국은 전략적 과잉팽창의 고전적 사례에 해당되며, 영국 정책결정자들도 이것을 알았다. 1934년 1월, 영국 재무부 차관 워렌 피셔는 국방소요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영국은 “광범위하게 분리된 전선에서 두 개의 1급 국가들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싸울 수 있는” 자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1)
1934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피셔와 밴시타트(외무부 차관), 네빌 체임벌린(재무부 장관)은 도쿄와의 화해를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만약 영국이 독일,일본과의 양면전쟁을 강요받는다면, 인도,중국,호주와 뉴질랜드에서의 영국의 이익이 엄청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위험도를 줄이기 위해서, 그는 외교를 통해서 도쿄와의 잠정적 충돌 원인을 제거하고, 영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영국 외무부가 이 정책이 영미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1)National Archives of the United Kingdom, Note by Sir Warren Fisher, 29 January 1934, CAB 16/109. Christopher Layne, “Security Studies and the Use of History”, 410.
참고- Christopher Layne, “Security Studies and the Use of History”, 410.
- 러일전쟁 이후 미국은 미일관계의 악화에 대비해서, 태평양에서 영일동맹의 저지를 목표로 삼았다. 미일 갈등에서 영국이 일본 편에서 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