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크라이나 전쟁이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과 다른가?
1979년에 베트남의 소련과의 동맹이 중국의 행동을 제한했다. 하지만 현재 우크라이나의 경우 그런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캉부 Khang Vu
보스턴 칼리지 정치학과 박사과정
the diplomat.com
March 01, 2022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서 많은 베트남 네티즌들이 1979년의 중국의 베트남 침략과 비교했다. 즉 한 강대국이 약소국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침략을 해서 약소국에 교훈을 주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은 1979년 2월 17일에 60만 병력을 동원, 베트남을 침략했다.
두 사건을 연결시켜서 해석하려는 유혹이 크지만, 1979년의 베트남과 2020년의 우크라이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중국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나라를 침략했고, 그 나라는 소련과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서양과 공식 군사동맹을 맺지 못했다. 비록 두 강대국의 침략 동기가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79년의 베트남은 강대국 소련이 조약을 통해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중국 지도자들의 전쟁 계획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와 다르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나토의 물리적 공격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동맹은 제휴,협력과 매우 다르다. 동맹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동맹관계의 국가들은 상대가 군사적 위협을 받을 때, 상대 국가의 방어를 위해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 동맹 조약이 중요한 이유? 첫째, 만약 한 쪽이 동맹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댓가를 치러야 하기 구속력을 가진 약속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군사 협력의 토대가 마련되어 승리 가능성을 높이고, 군사 원조의 비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휴와 협력은 기대에 불과하고, 의무가 아니다. 소련과의 1978년 조약 덕분에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에 있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와 나토의 제휴와 달랐다.
의심의 여지 없이, 1979년의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하노이의 소련과의 동맹 때문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이 자신의 주적인 소련과 동맹을 맺는 것이 중국 본토를 위협했기 때문에 이 동맹을 방해하려고 했다.
전쟁 전에 중국의 등소평은 중국 북부 국경에 대한 소련의 보복 가능성을 예견했고, 이것이 바로 침략의 규모를 제한했다. 중국 지도부는 하노이 정부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았고, 전쟁을 국경지방으로 한정시켰다. 중국군은 국경 도시들을 점령하고 바로 철수했다. 중국은 대중들에게, 침공은 그 기간이 제한적일 것이며, 이는 소련 개입을 막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소련은 중소 국경에 44개 사단 병력을 배치했다. 중국이 하노이 정권 전복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소련의 개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978년 조약을 상기한 소련은 중국의 침략이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했고, 베트남에 군수품과 고문단만 파견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벌어지는 것과 다르다. 푸틴은 침략이 단기적이거나 규모상 제한적일 것이란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러시아는 자신의 국경에 1979년 중국이 직면한 것과 같은 즉시 위협이 될 만한 군대와 대치하고 있지 않다. 푸틴은 또한 서양이 개입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제기했다. 말하자면 푸틴의 전쟁 목표는 최대주의적이며, 그는 이를 위해 높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다. 이는 1979년의 등소평과 다르다.
덧글
직접 파병시에는 3차세계대전의 서막이라는 우려 때문인지 간접적으로는 지원하는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저 글에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애초 이웃나라끼리 사이 좋은 경우가 거의 드물다보니, 베트남-중국도 그렇지만 베트남-캄보디아 관계도 발단이 되었으니까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이 고토 회복(...)을 이유로 먼저 베트남을 건드렸으니, 베트남 쪽에도 명분은 있었는데 문제는 베트남 레주언 정권도 이 기회에 눈엣가시같은 친중반월 크메르루주 정권을 뿌리 뽑아버리자고 아예 점령해버렸으니, 덩샤오핑에게도 명분을 제공(...) 지금까지도 중월 양국이 중월전쟁에 대한 인식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선 현재진행형이라고도 할 만 하죠.
우크라이나는 아무래도 소련으로부터 갈라진 신생국이라는 비애가 크게 작용하는듯 싶습니다. ㅠㅠ
그러고 보니 중국군도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 저 전쟁에서 사실상 별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비슷한 면도 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