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로 연합국의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과 처칠은 전후 질서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했고, 전후 아시아의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장개석의 야심과 대영제국의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처칠의 그것이 충돌했다.
1943년 중국의 야심에 대한 영국의 견제가 본격화되었다.
처칠은 특히 골칫거리였다. 1943년 3월, 장제스는 처칠이 전후 질서를 형성할 “3대 열강”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발언한 사실을 알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마찬가지로 영국 지도부도 중국에 부정적이었다. 1943년 7월 영국의 한 외교부 문서에서는 “대중국 원조는 오직 전략적 이익이 있을 때에만 첫 번째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을 방해하기보다는 충칭 정부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더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처칠은 중국을 열강으로 여기는 발상을 비웃으면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미국의 노력을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처칠은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중국이 다른 삼국에 비교할 만한 강국인 척하는 것은 미국의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영국은 미국의 의도를 믿지 않았다. 처칠은 영국이 우호적 제스처로서 홍콩을 중국에 돌려줄지 모른다는 루스벨트의 희망사항을 고려해줄 여유가 없다고 못 박았다.
래너 미터,중일전쟁, 370.
1943년 정세에서 장개석에게 적은 몇개의 세력이었는가?
국민당 정부내의 반대파, 모택동의 공산당, 중일전쟁의 적인 일본, 태평양전쟁의 적인 일본, 전후 아시아질서를 두고 갈등이 불가피한 영국의 처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루스벨트는 전후의 "강한 중국"을 선호했지만, 기득권 유지를 목표로 하는 영국과 소련이 "강한 중국"론에 반대했다.
장개석이 싸워야 했던 세력을 이데올로기로 표현하면, 봉건주의, 공산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식민주의였다.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로 2개의 세력은 제거했지만, 나머지 3개의 이데올로기 세력은 건재했고, 오랜 전쟁으로 기진맥진했던 장개석에게는 부담이 되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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