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노구교 사건과 장개석의 딜레마? Le monde


우리는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 사건에서의 쑹저위안의 제29군과 일본의 지나 주둔군의 무력 충돌이 중일전쟁의 시작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은 그렇지 않았다. 

래너 미터에 따르면, 그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았다. 아마도 미래를 알지 못하는 현재 속의 모든 정책결정자들의 딜레마가 될 것이다.

장제스는 중대한 질문과 맞닥뜨렸다. 이틀 동안의 전투가 이전의 여러 사례처럼 정말로 단순한 충돌이었나, 아니면 1931년의 만주 위기처럼 중국 영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려는 일본의 또 다른 시작의 전조인가? 만약 그가 전자라고 결론짓는다면 긴장은 빨리 가라앉을 수 있었다. 어쨌든 화베이 지방은 실질적으로 국민당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이곳을 장악한 세력은 장제스의 중국인 경쟁자들과 일본군에게 조종당하는 연합 정권이었다. 교전을 방치한다고 해서 장제스가 당장 곤란해질 일은 없었다. 만약 장제스가 이 사변이 심각한 상황이며 일본이 중국 북부를 침략해서 더 많은 영토를 점령 할 속셈으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중국 중심에 있는 국민정부의 심장부가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그는 전쟁이냐 아니냐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래너 미터,중일전쟁, 88-89.

- 이런 딜레마는 우리의 대통령이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다.

가령, 지난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같은 것이 그것이다.

북한이 장사정포로 연평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이 북한의 도발이 국지도발인지, 아니면 전면전의 시작인지 당분간 파악이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대응 수준에 대해서 결정해야 한다.

대통령이 김종인에게 물어보고 결정할 수 없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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