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빨갱이 마키아벨리주의자?" Le monde


1940년 가을,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원조하던 소련이 독일과 손을 잡고, 일본과도 화해를 모색하던 시기에, 모택동은 중일전쟁을 어떻게 전망했을까? 왜 마오는 중일전쟁에서의 국민당의 승리 보다는 차라리 일본이 국민당을 굴복시키는 미래를 선호한 것인가? 

1940년 9월 10일

모택동, 중국공산당 중앙 작전명령서, 중국의 항일전쟁을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첫째, 독일에 대한 영국의 항복 이후 미국의 중국전쟁 개입 가능성,
미국의 국민당 원조와 극동에서의 영미의 개입은 중국의 과격 반동파가 희망하는 것이며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위해 가장 유리한 국면이 될 것이다.

둘째, 이 시나리오에서 과격 반동파는 “민족 부르주아”와 약간의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국제적으로 친소 정책과 국내적으로 반공주의의 포기로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정책은 1938년 가을 이전까지 국민당 정부가 추진했지만, 이후 국민당의 친-영미, 반소련, 반공주의 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다. 

셋째, 일본의 충칭 점령과 일본에 대한 국민당의 항복. 이는 중국의 지배계급 내부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그리고 강력한 대중적인 반일 운동을 고조시킬 것이다. 국민당의 항복 시나리오는 첫 번째 보다 선호되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과격 반동파와 국민당 일당 독재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모택동은 영미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이 일본에게 승리하는 것 보다는 일본이 국민당을 패배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1) 

물론, 모택동은 세번째 시나리오의 위험을 인식했다. 중국과 일본의 평화 시에 일본이 새로운 병력으로 공산당 타도에 나설 것임은 모택동도 예상했다. 다만 1940년 9월의 정세에서 일본은 동남아 침략을 위해서 중국에서 발을 빼기를 원한다고 기대했다. 장개석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일본의 남진이 진행 중이었고, 그 결과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빠르게 악화되었다. 마오는 일본의 신규 가용 병력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이용되는 상황에서, 공산당에 대한 일본의 압력 증가의 비용은 공산당이 중국 민족주의의 대변자로 확립되는 이득으로 상쇄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다른 고려 사항도 있었다. 미일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의 국민당의 대일본 항복은 충칭과 워싱턴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었다. 그 결과, 장개석은 외국의 원조 없이 공산당과 싸우거나, 혹은 일본에 더욱 밀착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장개석의 민족주의 대의를 더욱 손상시킬 것이었다. 모택동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의 승리 보다는 국민당과 일본의 타협을 선호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2) 



1) Garver,  Chinese-Soviet Relations,  1937-1945, 136.
2) Garver,  Chinese-Soviet Relations,  1937-1945, 136-137.

모택동식의 논리회로로 2021년 11월의 한국정치 김종인의 생각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종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령, 1981년 프랑스 대선에서 왜 자크 시라크는 같은 우파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좌익 미테랑을 지지했을까? 데스탱 정권 아래서, 2등 우파가 되느니, 차라리 좌익 미테랑 정권 밑에서 제1야당의 투사가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였다고 한다.

김병준이 좌지우지하는 윤석열의 대한민국에서 2인자가 되기 보다는 차라리 이재명 체제에서 제1야당의 1인자가 되는 편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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