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중관계의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 Le monde

흐루쇼프,모택동 ,호치민

1950년대 베이징-하노이 관계와 미국의 오해?

냉전의 미중관계의 역사에서 특히 1950년대 후반에 양국은 화해의 계기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중관계의 악화가 1970년대 초까지 계속된 것은 인도차이나 정세와 관련있다. 

1956년 2월의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평화공존을 주장한 이후, 소련 쪽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공산주의 "꼴통" 모택동이 문제였다. 

세계공산주의 운동이 비군사적 투쟁 전략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중국은 여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무력을 통한 공산화를 고수한 것처럼 보였다. 동남아에서의 중국의 위협을 미국이 정책으로 이론화한 것이 바로 도미노 이론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하노이의 베트남 노동당 지도부는 베트남 통일혁명을 위한 무장투쟁을 점점 강조해 나갔다. 흐루쇼프의 소련은 물론 하노이의 무장투쟁 전략에 반대했다.

미국의 시각에서 문제는 베이징이었다. 미국은 하노이의 폭력투쟁 노선 전환의 배후에 베이징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즉 하노이의 투쟁은 동남아의 무력 공산화라는 베이징의 음모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50년대 후반에 하노이의 무장투쟁이 강화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수 없었다. 하노이를 앞세운 베이징이 동남아 공산화 침략에 나선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과 화해할 수 없었다. 즉 베트남이 미중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믿음과 다르게, 실제로 하노이의 무장투쟁 노선에 대한 베이징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1954년의 제네바 회담부터, 1950년대 후반, 심지어 1960년대 초까지 베이징은 하노이에 비-군사적인 정치투쟁 노선을 조언했다. 

이 조언을 무시하고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은 무장투쟁 노선을 실행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베이징의 도구가 아니었다. 

미국의 믿음과 다르게,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패권을 두고 하노이와 베이징은 협력과 갈등을 동시에 전개했다. 인도차이나에 대한 하노이의 패권을 견제했던 것은 바로 베이징이었다.  


참고- 

Gordon H. Chang, Friends and Enemies. The United States, China, and the Soviet
Union,1948-1968, A DISSERTATION,Stanford University,1987. 206.

- 닉슨과 키신저의 데탕트 전략은 하노이의 배후에 베이징이 있다는 인식을 넘어,

하노이와 베이징 관계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는 구상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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