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협정 이후 남베트남 무장투쟁과 하노이?" Le monde


평양과 남한 주사파 간의 관계에 영향을 받아서 ,

남한의 반정부 운동은 평양의 사주를 받은 것이고, 평양의 배후에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심장 모스크바가 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의 이러한 전형적인 인식과 다르게, 남베트남의 혁명운동의 현실은 달랐다. 남베트남 혁명운동을 무장 투쟁으로 이끈 것은 하노이가 아니라 남베트남의 반정부,좌익 운동세력이었다. 오히려 제네나 협정 직후에 하노이의 베트남 노동당 지도부는 남부의 무장투쟁 주장을 만류하고, 평화적 정치투쟁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하노이의 입장은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 

1957년을 즈음하여 남베트남 혁명세력이 고딘디엠 정부에 반대하는 무장 테러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할 무렵, 하노이 지도부 주류는 북베트남 혁명건설 우선론을 주장하면서, 남베트남 혁명 보다는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주장했다. 

남베트남 혁명운동의 무장투쟁론이 하노이의 공식 승인을 받은 것은 적어도 1959년 초의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15차 전원회의에서 였다.  the 15th Plenum of the Party Central Committee in early 1959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 혁명 운동의 좌경화,폭력혁명화를 주도한 것은 하노이가 아니라 남베트남 좌익이었다.  


참고- 

Logevall (2010). The Indochina wars and the Cold War, 292.


-베트남 혁명운동에 대한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하면, 남베트남 좌익운동을 하노이의 지도 대상이 아닌 상호간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양자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베트남 좌익이 현실의 정세변화에 대한 판단 아래 각자가 혁명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 경쟁을 했고, 이러한 경쟁이 베트남 혁명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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