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캐넌의 봉쇄정책과 호치민?" Le monde



만약 냉전 봉쇄정책의 아버지, 조지 캐넌이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담당했다면, 베트남전의 역사의 어떻게 달라졌을까?

캐넌의 봉쇄정책은 반공주의였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에 따르면, "봉쇄의 대상은 소련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다!" 즉 봉쇄정책이 목표는 반공주의가 아니라 반-소련주의였다는 것이다. 

"조지 캐넌적"이었던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은 1947-1950년 동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단일대오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복종하는 것이 봉쇄의 목표물이었지, 맑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소련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체제는 심지어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지않는 토착 세력의 공산주의와 미국이 손을 잡을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워싱턴은 1948년에 티토의 이탈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미국에 유리한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유고슬라비아가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9월의 베트남 혁명에서 중요한 쟁점은 호치민의 정체였다. 캐넌의 봉쇄논리에 따르면,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미국 정책의 범주는 호치민이 스탈린의 노리개 Stalin’s pawns 냐는 것이었다. 

스탈린과 호치민의 불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호치민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은 고질적이었고, 모스크바는 전후에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싸우는 호치민의 베트민에 대해서, 말뿐인 수사를 제외하고, 어떠한 의미있는 물질적 지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1) 

스탈린은 베트남 혁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는 1945년 9월에 탄생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프랑스를 인도차이나의 정통성있는 지배자로 인정했다. 그는 유럽 문제에 집중했고, 호치민을 불신했고,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오랫동안 베트민에 대한 물질적,외교적 지원을 하지 않았고, 프랑스 공산당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예산을 승인하는 것에 동의했다.  2)

이상과 같은 호치민과 소련 스탈린의 갈등을 고려하면, 공산주의자 호치민은 포용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즉 호치민이 인도차이나의 티토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공주의에 눈이 먼 워싱턴은 호치민과 베트남 혁명의 반-소련적 성향을 발전시키는데 실패했다.  이는 봉쇄정책의 일탈이었고, 이것이 이후의 미국의 베트남 재앙의 원천이 되었다. 

미국 정책에 따라 호치민의 베트남이 소련과 갈등하는 공산주의 국가가 될 가능성은 존재했다.

1) Mark Atwood Lawrence and Fredrik Logevall, eds., The First Vietnam War: Colonial Conflict and Cold War Crisi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25-26.

2) Logevall (2010). The Indochina wars and the Cold War,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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