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의 베트남 공산화와 베이징의 양호유환 養虎遺患 Le monde


중국에게, 1975년 남베트남 공산화 이후 인도차이나 정세를 속담으로 요약하자면,

양호유환, 養虎遺患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였다.

1949년 중공의 탄생이래 모택동의 중국은 호치민의 무장투쟁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리고 1973년 미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남베트남은 1975년에 공산화되었다.

통일 후에 베트남은 다음 단계의 혁명을 실천하려 했고, 그 다음 무대는 베트남 패권의 인도차이나를 구축하고,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미국을 몰아내려는 세계혁명을 실현하려 했다. 

이러한 베트남의 세계혁명에 제동을 건 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1975년 말, 하노이는 베이징이 인도차이나의 패권을 노리며, 특히 캄보디아에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1970년대 말에 베트남은 중국이 수정주의 국가이며, 반혁명 세력이라 규정했다.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공산 베트남은 세계혁명을 시도했다. 지난 20년 동안 하노이의 지도부는 자신의 통일 혁명을 미제와의 투쟁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혁명운동의 일부로 간주했다. 

1974년 말, 통일을 위한 최후의 공격을 앞두고 레주언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베트남 혁명의 국제적 의무를 강조했다. "감히 누가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할 것을 예상했단 말인가? 일단 이것이 현실이 된 이상, 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사회주의가 패권을 장악할 것으로 믿는다."

3년 후에 레주언은 베트남을 아시아의 세계혁명의 주역으로 간주했고,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혁명을 지원할 의무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이상과 같은 베트남발 동남아 세계혁명을 베이징은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패권 장악 시도로 간주했고, 이에 대한 봉쇄에 나섰다. 베트남 공산주의의 확장을 베이징의 공산주의 세력이 봉쇄한 셈이었다. 


참고-

Lüthi,“Vietnam”, in Cold Wars-Asia, the Middle East, Europe,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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