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족주의가 프랑스 제국과 동거한 방법?" Le monde


일반적으로 제국은 민족주의와 충돌,갈등하는 관계이다. 하지만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은 베트남 민족주의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역사적,전통적으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패권을 추구했는데, 프랑스 제국은 프랑스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패권을 보장하면서 베트남인의 협력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베트남의 협력하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2중의 식민지 상태였다는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의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로의 식민지 확장을 추구해왔다. 효율적 제국통치를 위해서 프랑스제국은 프랑스-베트남 협력 관계를 제시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협력이 필요했고, 태국의 확장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베트남인 엘리트들이 자신의 제국이라는 과거를 기억하도록 자극했다. 

1885년, 프랑스-베트남 협력을 주장한 쥘 아르망 Jules Harmand 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이중 식민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a policy of dual colonialism in Indochina : "베트남 민족은 자신의 역사적 야망이 우리 프랑스 덕분에 이전에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법으로 실현된다는 것이 이해할 날이 올것이다. 바로 그날에 안남인들은 우리의 도움 덕분에 그들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이웃국에 의한 굴욕과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은 이웃국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며, 자신의 지배가 우리 덕분에 확장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장래가 진실로 보장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인도차이나 통치를 위해서 지역 협력자가 필요했다. 유럽인들은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 많아봐야 3만 5천 명을 넘지 못했다. (1954년 알제리의 유럽인구는 100만 명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중국인 이민을 장려했지만, 문제의 해법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수만명의 베트남인 공무원들을 양성했다. 그들이 라오스의 비엔티안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근무하는 것을 장려했다. 캄보디아에서 코친차이나와 캄보디아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어, 캄보디아의 베트남 인구가 성장했다. 1911년 7만 9천 명에서 1921년에 14만 명이 되었다. 1913년 프놈펜의 시청에서 근무하는 16명의 인도차이나 관리들 중에서 14명이 베트남계였고, 2명이 크메르인이었다. 같은 이유로, 라오스의 베트남계 관리수도 증가했다. 1930년대 초에 베트남인이 라오스 행정직의 54%를 차지했다. 1930년대 말에 라오스의 비-베트남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98%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1937년,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 베트남인은 10,200명이었지만, 라오인은 9000명에 불과했다. 


참고-  Goscha, Vietnam: A New History. 140-141.

이같은 베트남-프랑스의 협력 관계는 20세기 베트남전쟁 시대의 베트남-중국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쟁 시대의 베트남과 중국은 미국과 싸우는데 동맹이었지만, 인도차이나의 패권 문제에 대해서는 갈등하는 양상을 보였다. 

인도차이나의 패권국이 되고자 하는 베트남의 열망을 프랑스 제국과 20세기 중국이 각각 협력과 견제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패권주의는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노동당은 라오스의 공산반군 파테트 라오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를 지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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