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은 어떻게 키신저를 떠올리게 하는가?" Le monde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베트남에서의 키신저 행보를 어떻게 상기시키는가?

How the U.S. Departure From Afghanistan Could Echo Kissinger's Moves in Vietnam

데이빗 카이저

TIME 온라인 보도

2019년 2월 6일

주소- https://time.com/5521882/vietnam-afghanistan/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했을때, 미국은 고딘디엠의 남베트남의 우호적 후견국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은 그로부터 19년 후에 베트남을 떠날 것이었고, 미군이 떠난지 2년 후에 베트남은 북베트남의 수중이 되었다. 미군이 개입한 지 18년 만에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디엠은 집권 초기에 베트남을 매우 확고하게 통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59년 북베트남의 게릴라 공세가 재개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압박이 되었고, 심지어 남베트남 반공주의자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1963년의 쿠데타로 디엠이 몰락하고, 1965년에 남베트남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협상 보다는 린든 존슨 대통령은 전투병을 보냈고, 1969년에 미국은 50만 이상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키신저의 보좌를 받는 리처드 닉슨이 집권했을 때, 닉슨 정부는 남베트남 반공주의 정부 유지라는 목표를 정했다. 하지만 전쟁을 실제로 체험해보면서 미국 정부는 미군 개입 축소라는 대중의 거센 요구에 직면했다. 이후 수년 동안 미군 개입의 수준이 점점 낮아졌다. 티우의 남베트남 정부도 선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72년 거의 모든 미국 지상군이 철수하자, 북베트남은 총공세에 돌입하여, 미공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요충지를 점령했다.

바로 그 때, 닉슨과 키신저는 국내적,국제적 명분을 내걸며 베트남의 미군 개입의 종식을 결정했다. 

1969년 이래, 키신저는 파리에서 북베트남 대표와 협상했다. 협상에 남베트남은 참여하지 못했다. 

1972년 가을에 북베트남의 공세가 중단되면서 양측은 중요한 양보를 했다. 북베트남은 티우의 즉시 퇴진 요구를 접었다. 대신에 키신저는 남베트남에 있는 15만 공산병력의 북베트남으로의 철수 주장을 포기했다. 또한 그는 사이공 정부와 민족해방전선을 "두 개의 남베트남 정치세력"으로 인정했다. 휴전 이후에 북베트남,사이공 정부,민족해방전선이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러한 협상 내용을 사이공의 티우는 알지 못했다.

티우는 이런 협상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키신저는 재협상을 해야했다. 북베트남은 요구 수준을 높였고, 키신저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리스마스 동안 하노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협상 중단 이후의 피바람 이후, 양측은 이전 합의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협상안에 다시 합의했다. 이렇게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났다.

베트남의 진정한 문제는 여전했다. 남베트남은 농촌에서 베트콩에 상대할 만한 수준의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군을 몰아내지도 못했다. 

미국-북베트남 합의 2년 후인 1975년에 북베트남이 다시 공세에 돌입,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는 완전 붕괴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 21년만에 남베트남 정부가 몰락했다.

베트남의 악몽이 콜린 파월 같은 군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거의 30년 동안 머나먼 곳에서 국가건설을 하는 일에 미국이 나서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알카에다 요원이 9/11 테러를 벌어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9/11 직후, 부시 정부는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소탕 뿐만 아니라 그들을 비호하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교체를 결정했다. 2000년 초 미국의 노력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0년 후 탈레반은 아프간의 지방에서 부활했다. 

과거 남베트남 사이공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의 새 정부는 부패로 물들었고, 적과 싸우기 보다는 미국의 원조로 재미를 보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3개 정부, 부시,오바마,트럼프는 승리를 위해 미군을 계속 보냈다. 어느 순간은 패배를 모면하기 위해서 보냈다. 

현실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통제의 전망은 결코 밝지 못했다. 인구는 남베트남의 4배가 많지만, 미국과 나토 군대는 오바마 정부 시절의 최대 병력이 14만 이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은 최대 55만이었다. 또한 미국은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비호를 받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아프간 전쟁에 대한 열의를 잃었다. 오바마 집권 말기에 미국과 나토 모두 군대를 다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도 아프간 개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2019년 현재, 탈레반은 지방의 대부분에서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미국 협상대표인 새로운 헨리 키신저, 칼리자드가 탈레반과의 협상안 마련에 거의 근접했다. 협상안은, 미군이 철수하는 대신에 탈레반이 자신의 영토에서 반미 테러리스트가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1972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현재의 아프간 정부와 협상에 대해 합의한 사항은 없었다. 1972년에 티우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 대통령도 즉시 항의했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세력에 밀리고 있고, 티우가 그랬던 것처럼, 미군이 철수하면 아프간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닉슨과 키신저가 1973년에 미군 철수를 결의했고, 후임자 포드는 1975년에 베트남 공산화를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공산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국가안보의 장기적 손실은 없었다. 44년이 지난 현재 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우호적이다. 

비슷한 식으로, 미국은 탈레반의 권력 장악이라는 현실에서, 탈레반 체제가 아프간에서 새로운 경쟁자인 IS와 경쟁,갈등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슬람국가(IS) 등과 연계된 ‘파키스탄 탈레반’과  ‘아프간 탈레반’ ) 

미국에게, 현재의 베트남이 탈레반의 미래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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