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국의 양안 관계는 오늘날의 그것과 다소 유사했다. 명청교체의 격동기에 남명 지지세력인 정성공이 타이완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낸 후에 ,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청나라의 강희제와 타이완의 정성공이 대치했다.
1662년 6월에 정성공이 열병에 걸려 급사하고, 장남인 정경 Zheng Jing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경은 20세기에 장개석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 분리된 타이완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모색했다.
1667-1669년, 정경은 청나라와 '데탕트'를 모색했다. 그는 타이완 왕국의 대외적 정통성을 얻기 원했다. 청나라와의 협상에서 정경의 대만은 "섬이 중국에 속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청나라가 자신을 한국식의 조공국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만 측은 또한 변발을 하지 않을 것이며, 복장 문제에 대한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청 조정으로부터 군사와 상징문화에 대한 자치를 요구했다.
청의 강희제는 섬을 정경의 세습 봉토로 인정하고, 심지어 무역의 특권까지 약속하려 했지만, 협상 타결의 전제 조건으로 만주족식 변발을 요구했고, 이는 새 왕조에 대한 충성의 증거였다. 그는 정경의 조직을 국내 반란 세력으로 인식했고, 조선식의 외국 조공왕국이 되기에는 너무 "중국적"이라고 생각했다.
양측은 타협점을 찾는데 실패했고, 1669년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1683년 청국은 결국 무력으로 타이완을 재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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