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세이난 전쟁과 이홍장? Le monde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에 대해서 이홍장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본의 국난,내란을 메이지 일본 타도의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을까?

1877년 사쓰마 반란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일본 정부에 10만개의 탄약통을 기꺼이 제공했다.1) 

1871년 청일수호조규 이래 이홍장의 대일정책 기조는 聯日制西, 즉 일본과 연대하여 서양을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2) 중국이 연일한다고 제서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강력한 적 하나는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홍장의 일본인식이 파탄을 맞이한 것은 1879년 일본의 류큐 강제합병과 더불어서 였다.

류큐합병에 충격을 받은 이홍장의 중국은 조선정책을 급히 변경했다. 이전까지 중국은 조선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다. 1870년대 말까지 청의 조선정책에서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다. 3) 하지만 류큐 사태는 중국의 변경 조공국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이홍장에게 주었다. 따라서 이홍장은 사태에 개입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북경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선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류큐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청 정부가 채용한 구체적 대책은 조선과 서양 각국의 조약 체결이었다.4)  

1879년의 류큐합병을 일본제국 역사의 관점을 넘어서 한중관계사로 확장하여, 류큐-일본-중국-조선 관계로 관점을 확장해야 한다. 말하자면, 79년의 류큐 합병이 청나라의 조선정책에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른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강화가 일본 정부의 조선 정책에 영향을 주었고, 뿐만아니라 김옥균 등의 개화파의 반중의식을 자극해서 갑신정변과 같은 비극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1879년 류큐합병이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1) Key-Hiuk Kim,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279.
2) 리시주, 도희진. (2011). 李鴻章의 대일 인식과 외교책략.20.
3) Yu Suzuki,Relationship with Distance,68.
4) 오카모토 다카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104.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