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의 베트남 위상 하락을 보여준 것? Le monde


1968년 하노이의 테트 공세는 모택동의 인민전쟁론에 모순되는 공격이었고, 같은 해에 하노이는 베이징과의 사전 교감 없이 미국과의 평화협상 시작을 결정했다.

특히 68년에 베이징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8월에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하노이가 지지한 것이었다. 하노이는 소련의 침공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위한 것이라 지지했다. 

베이징은 '전쟁의 베트남화'로 압력을 행사했다. 중국군의 철수는 1968년에 시작되어, 1970년 중반 10만 명 이상의 전체 중국군이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여기에는 대공방어 부대도 포함되었다.
1968-1970년 동안, 베트남에 대한 베이징의 군사적,경제적 지원 속도는 둔화되었고, 베이징은 하노이에게 자립을 강조했다. 지원을 줄이는 와중에, 중국은 군사 지원보다 경제 지원을 보다 강조했고, 1968-1969년 베트남으로의 무기 지원을 많이 줄였고, 1970년에는 50%를 더 줄였다. 
더 나아가,베이징은 남쪽에서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인내와 자제를 촉구했다. 이는 지난 3년 동안 모택동과 그의 동료들이 제안했던, 공세적,공격적 전략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 

베이징에서의 하노이의 위상 하락은 196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일에 가시화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베트남 대표단은 의전 서열에서 호주 공산당 대표단 다음이 되었다. 이는 베이징에서의 하노이 대표단의 위상 추락을 반영했다. 

10월 6일 주은래는 하노이의 중국 대리대사에게 전문, 팜반동 총리에게, 중국의 국내 상황 때문에 중국은 방중을 원하는 북베트남 대표단을 당분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라고 명했다. 

10월 9일, 주은래는 베트남 무역부 차관 리반과의 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상은 1954년 제네바 회담과 유사한 오류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중국은 베트남 주둔 공병대와 대공포 부대의 철수를 시작했다. 2)

1) Thomas J. Christensen, Worse Than a Monolith: Alliance Politics and Problems of Coercive Diplomacy in Asia , Princeton University Press (April 3, 2011),203.

2) Christopher Anthony Connolly,Barbarians in the South: China's Vietnam Policy, 1966-73 ,A thesis,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 2007.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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