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둑토,"베트남은 동남아의 프로이센이다." Le monde


레둑토와 키신저

1954년의 제네바 협정과 1975년의 베트남 통일을 비교할 때, 어떤 사건이 인도차이나 지역 질서의 안정에 공헌했는가?   

키신저에 따르면, 파리 평화협상에서 

북베트남 대표 레둑토가 흥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동남아의 프로이센이다. 인도차이나 뿐 아니라 동남아를 지배하는 것이 베트남의 사명'이다. 

- 이병한, [동아시아를 묻다] 지압 장군을 보내며,프레시안, 2013년 10월 23일

- 비로 여기서 베트남전에 대한 중국의 사명이 나온다. ㅠ

치앙자이 Qiang Zhai 는 중국의 베트남전 정책의 이중성을 강조했다 : 협력과 봉쇄. 

말하자면 베이징은 북베트남이 남쪽에서 미제와 싸우는 것은 돕지만,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에 나서는 것은 봉쇄했다.

1968-1969년, 베이징은 하노이에게 캄보이아 혁명의 사주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1970년 캄보이아 위기 동안,베이징은 시아누크를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론놀과의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는 투트랙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캄보디아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 였다. 

인도차이나 전쟁의 마지막까지 베이징은 하노이를 돕기는 했지만, 동시에 반-베트남 성향의 크메르루즈를 지원했고, 이는 하노이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

Qiang Zhai, China and the Vietnam Wars, 1950-1975 (Chapel Hill-NC: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0), 217-218.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도미노이론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ㅠㅠ

참고로, 헨리 키신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이 해를 거듭하면서 중국이 하노이의 승리에 내키지는 않지만 대비하고 있다는 몇 가지 조짐이 나타났다. 정보 당국은 라오스 북부에서 중국이 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낌새를 알아챘다. 이 지역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미국과의 갈등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전후 베트남과 균형을 맞춘다든가 라오스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는 경우의 전략을 위해서는 쓸모가 있을 것이었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베트남전이 끝난 다음인 1973년 저우언라이와 나는,베이징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전 캄보디아 통치자 노로돔 시아누크와,당시 프놈펜 정부와 크메르 루주 사이의 연합을 기반으로 한 전후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협상하고 있었다. 하노이가 인도차이나를 접수하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미 의회가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이 더는 군사적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사실상 금지함으로써 미국의 역할이 무관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결국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I

당시의 동맹국을 향한 하노이의 숨어 있던 적대감은,내가 1973년 2월 불과 두 주일 전에 조인했던 파리 평화 협정의 시행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아주 생생하게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레둑토가 나를 하노이의 국립 박물관에 데려갔는데,중국이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베트남의 맹방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베트남이 얼마나 중국과 투쟁해 왔는지를 보여 주려는 목적이 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과 더불어 내재된 역사적 경쟁 심리는 동시에 드러났고,이념을 억누른 지정학적 승리로 이어졌다. 베트남전의 의미를 잘못 평가했던 것은 비단 미국뿐이 아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이 이 전쟁에 처음 개입했을 때,중국은 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쯤으로 보았다. 중국은 하노이와 거의 일상적으로 운명을 같이해 왔다. 그래서 미국의 간섭을 중국 포위를 향한 또 한걸음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10년 전 미국의 한국 전쟁 개입을 바라봤던 것과 다름없었다.

역설적으로 베이징과 워싱턴의 장기적 이해관계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동일해야 마땅했다. 양국 모두 인도차이나가 4개국으로 분할되어 있는 현상 유지를 선호했어야 마땅했다.

헨리 키신저, 『 (헨리 키신저의)중국 이야기 』, 민음사,2012,4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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