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통킹만 사건과 하노이의 대응의 의문점?" Le monde


통킹만 사건 이전까지 하노이 노동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은 남베트남에서의 "제한적" 무장 투쟁을 통해서 사이공 체제를 끝장내자는 것이었다. 하노이가 "무제한" 무장 투쟁을 꺼린 것은 미국의 군사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정부 이후 미국은 이미 특수전 형태로 남베트남에 개입했다. 하노이는 무력 도발로 미국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여, 미군이 직접 군사개입하는 "제한전" 단계로의 확전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북베트남은 통킹만 사건 이후에도 베트콩의 미군에 대한 공격을 승인한 것인가? 

통킹만 사건과 하노이 지도부의 관련 여부도 여전히 불명확하다. 북베트남의 호앙 응이아칸 Hoang Nghia Khanh 장군은 64년 8월 2일 밤, 미국 해군의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수역으로 다가올 때, 전투작전 A국 국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의 회고록은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의 공격은 최고사령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상관인 반티엔둥이 당시 이 공격은 실수였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베트남은 전쟁이 북베트남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었다. 

하노이의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르면, 매덕스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은 참모본부의 당직 장교의 실수였다. 따라서 어뢰정의 공격은 노동당 고위 간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 해군의 영해 침입과 몇 일전의 북베트남 섬에 대한 미 해군의 포격 도발에 대한 북베트남 참모본부의 별 생각없이 자동반사적으로 내려진 명령으로 해석 가능하다. 만약 그랬다면, 이는 군대에 대한 하노이의 명령 체제의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노이는 미국의 확전, 특수전의 제한전으로의 발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통킹만 사건은 실수로 그랬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왜 하노이는 사건 이후 베트콩이 미군 병사를 계속 공격하는 것을 내려버 두웠는지가 의문이다. 특히  1965년 2월 7일 플레이쿠 공격이 문제였다.

2월 7일
민족해방전선이 중부 고원의 플레이쿠 미군 헬기 기지를 공격했다. 8명 전사, 126명 부상, 헬기 10대가 파괴되었다. Pleiku in the Central Highlands
이에 대한 보복으로 132대의 미군 제트기가 북베트남의 사전 목표물을 공중 공격했다. 당시 소련 총리 코시긴이 하노이를 방문 중이었다. 

왜 하노이는 미국의 보복을 불러 올 플레이쿠 사건을 막지 않았을까?


Zachary Shore, "Provoking America: Le Duan and the origins of the Vietnam War," Journal of Cold War Studies, v. 17, no. 4, Fall 2015,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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