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하노이의 권력투쟁? Le monde


집권후 소련의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주장했다. 그의 성향이 특히 심각해 진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였다. 치앙 자이에 따르면, 1962-1964년 동안 모스크바는 베트남 사건에 대한 방관자로 남았다. 흐루쇼프는 미국과 평화공존을 추구했고, 특히 1962년의 쿠바 미사일위기 이후 미국과 충돌을 기피했다. 1)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베트남-소련-중국 관계가 요동을 치게 되었다. 소련이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가운데, 레주언이 장악한 하노이 강경파는 남베트남에서의 무장 투쟁을 강화해 나갔다. 모택동은 흐루쇼프와 다르게, 레주언의 반미 투쟁을 지지했다. 따라서 레주언은 중국의 정책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소련이 고립되고, 베트남-중국 관계가 강화되었다. 

이런 사회주의 국제관계의 변화가 하노이의 권력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호치민의 비서, 부이 틴 Bui Tin에 따르면, 쯔엉찐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 정책을 지지했지만, 레주언은 중국 정책을 지지했고, 자신의 의견을 정치국에서 관철시키려 했다. 지압은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중립을 지키려했지만, 1962년 이후 그는 레주언과 레둑토에 의해 “코너에 몰리게” 되었고, 두 사람은 노동당 중앙위를 장악, 지압이 “친소파”라 비판했다. 심지어 지압을 정치국과 노동당에서 제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호치민이 지압을 보호했다. 물론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레주언의 입장으로, 그가 중국의 정책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중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언은 무엇보다 베트남 애국자였다. 그가 베이징의 입장에 찬동한 것은 당시의 베트남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2) 
 
1) Qiang Zhai, China and the Vietnam Wars, 122.

2) Qiang Zhai, China and the Vietnam Wars, 123.


중소 갈등의 심화가 베트남 노동당의 권력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1962년 현재 레주언,레둑토가 친중파로 분류되었다면, 전통적 당권파인 호치민,쯔엉찐,보구엔지압은 친소파로 남았다. 
 



덧글

  • The buzzard 2020/07/29 01:49 # 답글

    보통 레주언을 =친소/ 쯔엉찐, 보구엔지압=친중 이렇게 등식화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 반대의 구도가 나왔다는게 굉장히 흥미롭네요. 그런거 보면 인물들 간에 상대적 친중/친소적 성향은 있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다들 베트남 민족주의를 우선시하고 그떄 그때 자국의 상황과 부합하는 쪽과 연대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한 해석일 수도 있겠습니다.
  • 파리13구 2020/07/29 04:02 #

    레주언은 친중하다 친소로 변했다는 해석이 있고,

    당시 하노이 소련 대사는 지압을 친소파의 선봉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
  • The buzzard 2020/07/29 01:55 # 답글

    근데 그런 관점에서 중월전쟁 국면에서 지압과 쯔엉찐 등이 친중을 빌미로 당 내 권력에서 어느 정도 밀려나고 레주언과 '친소'파가 득세했다는 해석 역시도 실제로 이들이 친중/친소 노선을 각각 걸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그저 당내 투쟁을 위한 명분이었을 개연성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이네요
  • 파리13구 2020/07/29 04:04 #

    지압과 쯔엉찐은 60년대 초부터 이미 정책결정의 핵심에서 멀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레주언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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