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몰로토프,베트민 대신 프랑스 편을 들었나? Le monde

[54년]지압,디엔비엔푸 공격을 연기한 이유는?


몰로토프 스타일의 소련외교란 무엇인가? 소련외교의 중심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공산주의 동맹국에 대한 의리인가, 아니면 자국의 안보를 위한 국익추구인가?

1954년 몰로토프의 소련 외교의 관심사는 유럽이었고, 유럽방위공동체의 출범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유럽방위공동체(歐洲防衛共同體, European Defence Community, EDC)는 1952년 5월 파리에서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 6국이 서유럽방위를 목적으로 체결한 EDC조약에 따라 설립이 추진되었던 초국가적 성격의 군사공동체이다. 즉, 서유럽방위를 도모하기 위해 초국가적인 '유럽 통합군'을 창설하고, 서독의 재군비를 허용하여 통합군에 편입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던 EDC조약은 동월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정식승인을 받았다. 궁극적으로는 브뤼셀 조약을 대체하려 한 EDC 계획은, 1954년 8월 프랑스 의회가 서독의 재군비를 인정치 않고 조약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몰로토프는 어떻게 유럽방위공동체의 무산에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과거의 스탈린의 사냥개가 발견한 공동체의 약한 고리는 프랑스였다. 소련 외상은 공동체와 프랑스 사이의 쐐기를 박으려 했고,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1954년초 디엔비엔푸의 결말을 앞두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기를 원했고, 소련은 중국과 손을 잡아서 베트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프랑스와 소련의 공동의 이해가 성립되었다. 프랑스가 유럽방위공동체를 무산시키는 대신에, 소련은 베트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명예롭게 철수하는 것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1954년 소련전략에서 사활적 이익이 달린 곳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바로 유럽이었다. 유럽에서의 소련의 이익을 위해 프랑스와의 우호가 필요했고, 이 우호를 위해서 베트민은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작은 이익에 불과했다. 

몰로토프의 쐐기박기 작업이 시작된 곳은 1951년 1월 베를린이었다. 1월 25일 베를린에서 미국,영국,소련,프랑스 4개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관련 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이었지만, 몰로토프는 프랑스의 조르주 비도에게 인도차이나 재앙 해결에 소련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소련과 프랑스의 밀착이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를 화나게 만들었다. 

1월 27일 덜레스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프랑스 대표단과의 석식 만찬에서 몰로토프가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해서 소련이 중재에 나설 용의가 있으며, 프랑스 정부가 정확한 타협안을 제시한다면 소련이 중재에 나설 것"이라 발언했다고 보고했다. 

조르주 비도와의 다른 대화에서 몰로토프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비도가 프랑스가 정부가 국가적 명예를 지키면서 인도차이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데 고심하고 있다고 말하자, 몰로토프는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에서 프랑스가 받은 최대의 원조는 바로 중국이 제공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몰로토프는 이후의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발을 뺄 수 있도록 소련과 중국이 도울 것이라 제안했다.

실제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압승으로 기고만장한 베트민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타협을 강요한 것이 바로 소련과 중국이었다. 회담에서 특히, 소련과 중국은 협상 결렬시에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의 미국이 군사 개입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에 베트민에 타협을 강요했다. 몰로토프의 소련의 중재 덕분에, 망데스 프랑스 총리의 프랑스는 베트남 전장에서 잃은 것을 제네바의 강대국 외교 무대에서 되찾을 수 있었다.

제네바에서 소련의 중재에 대한 프랑스 보답은 54년 8월 30일에 있었다.

8월 30일
프랑스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Piere Mendes France는 유럽 방위공동체 조약을 표결에 붙였다. 그는 찬성 결과를 위해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부결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결과는 처참했다. 319 대 264로 의원의 다수는 유럽 방위공동체 조약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아데나워와 미국 동맹 세력들은 경악했다. 반면, 소련 지도자들은 오랜 노력이 끝내 성과를 냈다고 반겼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외교의 전통, 냉전 시대 프랑스의 리슐리외의 국가 이성 (불어 raison d'État , 영어 reason of the State) 이었다. "국익이 최우선이다!" 

모스크바가 눈물을 믿지 않는다면, 파리는 이념의 동맹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리슐리외적이다. 


-참고,

Ilya V. Gaiduk, Confronting Vietnam: Soviet Policy toward the Indochina Conflict, 1954-1963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14-15.

1954년 제네바는 베트민에게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이 무엇인지 알게 만들었다. 

54년 제네바에서 몰로토프는 탈냉전적이었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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