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알리와 베트남전 Le monde

[54년]지압,디엔비엔푸 공격을 연기한 이유는?

서울을 방문한 무하마드 알리 -1976년

캐셔스 클레이 주니어는 1942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세의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고, 두 번의 골든 글러브 챔피언이 되었고, 1960년, 아마추어 복서로 로마 올림픽에 참가하여 복싱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64년 소니 리스턴(Sonny Liston)을 이기고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헤비금 챔피언이 되자마자 그는 블랙 무슬림단 the Black Muslims 에 가입했고,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도 개명했다. 
1964년 미국 징병위원회의 IQ 검사에서 알리는 78점을 받았다. 알리, "나는 위대하다고 말했지, 머리가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78점으로 알리는 1-Y 등급을 받았다. 이는 징병 부적격 등급이었다. 하지만 2년 뒤, 베트남전이 확전되면서, 미군은 징병을 위한 최저 점수를 낮게 변경했다. 이렇게 알리는 1-A 등급이 되었고, 징병 대상자가 되었다. 

알리는 종교적 이유로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의 징병유예를 호소했다. "나는 어떻든 간에 베트콩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베트콩은 나를 결코 검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그의 호소는 거절당했고, 그는 1967년 4월 18일에 징병 통보를 받았다. 알리는 징병을 거부했고, 세계권투연맹은 그의 챔피언 자격을 박탈했다. 1967년 6월에 알리는 선별 복무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10,000 달러 벌금과 5년 징역형의 판결을 받았다. 
알리는 반전 운동의 영웅이 되었다. 1970년 6월 대법원이 알리의 유죄 판결을 번복했고, 1974년 10월, 그는 해비급 챔피언 지위를 회복했다. 

알리는 1980년에 권투에서 은퇴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알리를 아프리카 특사를 임명한 적이 있고,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아프리카 보이코트를 위해 로비했다.  

참고-

키워드 

베트남전, 무하마드 알리, 징병거부, 반전운동, 흑인운동, 블랙 무슬림,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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