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유화정책과 데탕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Le monde

알프레드 마한, "외교관은 예술가이다."

키신저는 미국 공화당 정부에서 일했지만, 그의 데탕트는 네오콘의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데탕트가 유화정책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닉슨과 키신저가 소련에 너무 많이 양보했음에도 미국은 별로 얻은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1) 네오콘의 선두에 월포위츠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있었다. 

키신저는 데탕트가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유화정책- 정의없는 평화의 한계였는가? 왜 평화의 일방적 추구가 정책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전쟁의 공포를 전제로 한 평화 추구는 왜 혁명세력의 무기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영국의 유화정책은 정의없는 평화만을 추구하는 정책은 도덕의 무장해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데탕트에 대한 우파 내부의 비판에 직면해서, 키신저는 데탕트의 정의의 미묘한 수정을 시도했다. 1974년 9월, 키신저는 '데탕트가 소련과의 더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모색'이라 정의했다. 베트남 함락 이후인 1975년 7월, 키신저는 "경쟁적인 관계를 조절하기 위한 수단"이라 불렀다. 1976년 2월, 그는 데탕트를 "소련의 팽창을 막기위한 것"으로 정의했다.  -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우리는 긴장 완화를 소련에 대한 양보로 간주하지 않았다. 데탕트에 대한 우리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국익의 관점에서 그것을 재정의 하려고 단지 노력했을 뿐이다. 데탕트는 우호가 아니라, 적들 간의 관계를 위한 전략으로 정의된다.” 2) 그것은 미국의 쇠락을 관리하기 위한 틀이 아니라 워싱턴이 무의미한 위기에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며, 미국의 자원이 소련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지속적으로 사용되게 만들기 위한 것이란 반론이었다. 3)

1) George Allen Sufana, "Detente: The Great Foreign Policy Debate", Master's Theses, Loyola University Chicago (1980).p.28.
2) Kissinger, Years of Upheaval , Simon & Schuster, 1982,pp.236-237
3) Greg Grandin, Kissinger's shadow : the long reach of America's most controversial statesman, Metropolitan Books/Henry Holt and Company,2015.p.162.

어떻게 보면 이는 키신저의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데탕트고, 니가 하면 유화정책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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