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와 베트남, 냉전 투사?

[54년]지압,디엔비엔푸 공격을 연기한 이유는?




케네디 암살과 관련해서 유명 영화감독을 포함한 일부 논객들이 암살이 없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케네디가 냉전 투사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하다.

1930년대 대학생 시절에 케네디는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목격했고, 관련 논문을 쓰기까지 했다.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학사학위 논문으로〈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 Why England Slept〉(1940)를 제출했다. 

의원 시절의 케네디는 냉전에서의 단호한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전쟁에 대한 자금 지원을 지지했고, 미국은 공산주의 물결이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딘디엠의 오랜 지지자였다. 그는 디엠을 "동남아시아 자유 세계의 초석이며, 아치의 기둥석 그리고 제방 속의 손가락"으로 비유했다. 그는 베트남을 아시아 민주주의의 토대를 입증할 뿐만아니라 미국의 책임과 결의의 시험대라 규정했다. 그는 봉쇄정책을 지지했고, 중국 공산주의의 끊임없는 압력에 맞서 선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많은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모스크바가 조종하는 단일 공산주의 대오의 위협을 두려워했고,  민족해방 전쟁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세계 지배라는 소련의 계획의 증거로 간주했다. 

도미노 이론을 언급하면서, 그는 "다른 어떤 도전 보다도 우리의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보가 한 조각씩, 나라 별로 저해될 것이다."


참고-

Stanley Karnow, Vietnam: A History,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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