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르클레르와 베트남? Le monde

[54년]지압,디엔비엔푸 공격을 연기한 이유는?



자크 필리프 르클레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자유 프랑스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아이젠하워의 협조 아래 르클레르의 자유프랑스군이 파리를 해방하고, 그의 부대가 스트라스부르와 보르도도 해방시켰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6월 드골이 르클레르를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주권 회복을 위한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르클레르는 열의가 없었다. "나를 모로코로 보내달라"고 그가 거듭 요청했다. 드골은 "당신이 인도차이나로 가야하는 이유는 그곳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라 답했다.

르클레르는 프랑스에 대한 일본의 공식 항복문서에 서명했고, 1945년 10월 5일에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군과 협정을 체결, 남베트남에서 프랑스 지위 보존에 합의했다. 

10월 25일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재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원래 소탕전이 한 달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르클레르의 기동 기계화 부대가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프랑스 통치를 빠르게 확립했지만, 그들은 고작 4만에 불과했고, 도시와 주요 도로만을 점령했을 뿐이었다.

르클레르는 베트남을 둘러본 후, 정치적 군사적 문제가 가로놓여 있음을 절감하고 그의 정치고문 폴 뮈에게 "50만 명은 있어야 겠군. 그런데 그렇게 있어도 될지 모르겠어."라 말했다.

그는 베트민이 민족주의 운동 세력이며 프랑스는 베트민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1946년 3월이 호치민-생트니 협정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르클레르는 정글전쟁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협상을 선호했다. 1946년 3월 17일에 파리로 보낸 비밀 보고서를 통해서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무력을 통한 해법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 다르장리외와 그의 측근들은 베트민에 대한 의미있는 양보를 거부했고, 르클레르는 좌절 속에서 인도차이나를 떠났다. 

1946년 7월 14일에 그는 북아프리카 프랑스군 감찰 총장에 임명되었고, 장군으로 진급했다. 

르클레르는 1947년 11월 28일 비행기 사고로 45세로 사망했다.


Spencer C. Tucker (ed.), THE ENCYCLOPEDIA OF THE VIETNAM WAR-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Second Edition, ABC-CLIO, LLC,2011. 636-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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