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테트 공세, 하노이와 민족해방전선의 갈등? Le monde

[54년]지압,디엔비엔푸 공격을 연기한 이유는?


68년,테트 공세와 중국과 민족해방전선...

1968년 1월의 테트 공세를 즈음해서, 하노이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이해관계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의 평화협상과 관련해서, 북베트남은 협상 쟁점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미군의 공습중단을 주장했는데, 민족해방전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사활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달리 말해서 하노이에게 민족해방전선은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하노이가 미국과의 협상추진파였다면, 민족해방전선은 협상반대파였다. 동맹관계로 보면, 전자가 친소적 성향을 가진반면, 후자는 친중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구조였다.

베이징은 바로 하노이와 민족해방전선 간의 입장차에 주목했고, 평화협상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민족해방전선과 직접 거래에 나서려고 했다. 베이징의 시각에서 민족해방전선은 하노이 보다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더 충성하는 또 하나의 베트남에서의 정치적 실체였다. 

흥미로운 것은 테트 공세의 결과이다. 테트 공세는 베이징이 주장한 장기적 소모전 단계를 넘어선 공격이었다. 지압의 베트남 인민군은 전면전,진지전 단계의 전쟁을 시도했고, 이 단계의 전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중국이 제공하는 개인화기가 아니라 소련만 제공할 수 있는 첨단 무기였다. 군사원조라는 관점에서, 테트 이후 북베트남은 중국 보다는 소련의 군사지원에 더욱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테트 공세로 민족해방전선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이전 규모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민족해방전선 전력의 축소는 하노이의 평화협상 노선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테트 공세를 계기로 북베트남은 소련 무기에 의존하게 되었고, 남베트남 해방 투쟁에서도 민족해방전선 주도의 소규모 게릴라전이 아닌, 소련 무기로 무장한 베트남 인민군의 무력을 중심에 두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식 소규모 게릴라전이 아닌, 소련 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전면전을 나서면서도, 파리에서의 평화협상을 동시에 하는 "싸우면서 협상하는" 단계로 테트 공세를 계기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9 대표이글루_역사

방문자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