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러일전쟁과 모로코위기?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러일전쟁의 중재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알려졌지만, 그가 유럽의 다른 전쟁 위기도 막았다는 점은 잊혀졌다.
1905년 독일은 외교적 고립감에 긴장했다.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러불동맹으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 하에 있었다. 1904년 영불협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가 독일을 포위하는 외교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포위망 파괴를 위해서 독일이 일으킨 것이 1905년 3월의 제1차 모로코 위기였다.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하자, 카이저가 모로코의 독립을 주장했던 것이다. 독일은 위기를 통해서 전쟁위기를 만들어, 영불관계를 이간질시키려 했다. 독일과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 영불관계는 이완될 수 밖에 없었다.
독일 육군의 슐리펜은 프랑스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당시가 바로 적기였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극동에서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었고, 영국도 보어전쟁의 여파로 전쟁을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었다. 슐리펜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예방전쟁을 주장했다.
모로코 위기가 한창일 동안, 루스벨트 대통령은 즉시 위기에 주목했다. 영불협상에도 불구하고, 만약 독일 육군이 프랑스 국경을 향해 진격한다면, 영국 해군이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독불전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 협상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세계적 규모의 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6월 25일, 미국 대통령은 독일 대사 슈테른베르크에게, "아무도 이런 하찮은 이유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이해할 수도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는 카이저의 대사에게, 전쟁의 경우, 프랑스에 대한 원조가 엄청날 것이라 말했다.
독일 빌헬름2세는 루스벨트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유럽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독일은 1905년에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의 좋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Dennett, Tyler, Roosevelt and the Russo-Japanese War : a critical study of American policy in Eastern Asia in 1902-5,Gloucester, Mass., P. Smith,195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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