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베트남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두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동양이 서양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 처럼 서양의 과학,기술,지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 이런 근대화는 일본 처럼 독립국가라는 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결국 베트남은 무력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해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이후 하노이의 최고 명문 사립 고전학교 동킨기아툭 the Dong Kinh Nghia Thuc 은 중국과 베트남을 현대 일본의 우월성에 비해 낙후된 나라로 간주했다. 이에 문명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이었다. 

베트남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 Phan Boi Chau 는 학생들을 일본에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고, 응우엔 왕조의 부활과 프랑스인의 추방을 주장했다. 1905년 초, 그는 일본에 가서, 일본의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그는 캉유웨이 康有爲와 량치차오 梁啓超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이 프랑스와 서양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는데 관심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1913년 옥중일기에서 판은 다음을 주장했다. 

"일본의 승리가 우리에게 신세계를 열었다. 프랑스 침략 이전에 우리는 중국만 알았다. 프랑스가 온 이후,  중국을 제외하고 프랑스는  우리가 아는 전부였다. 베트남인들은 변화하는 세상을 결코 꿈꾸지 못했다. 일본의 승리가 우리가 큰 영향을 주었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다. 
프랑스에 대한 무장 투쟁은 외세의 지원없이 불가능하다. 역사,지리,인종의 관점에서 중국이 최상의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은 1884년 청불전쟁의 텐진 조약 이후 우리의 주권을 프랑스에게 넘겼다. 1885-1886년의 반프랑스 봉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실망했다."



Rotem Kowner(ed.),The Impact of the Russo-Japanese War, Routledge,2007.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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