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독일령 칭타오 문제?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러일전쟁과 더불어 ,극동에서 일본의 힘이 확인되자, 독일은 중국에서의 자신의 권익, 특히 칭타오 Tsingtao (Kiaochow) 방어를 근심하게 되었다. 

독일은 칭타오 방위 계획을 세웠다. 2문의 240미리 포, 4문의 210미리 포, 7문의 150미리 포가 배치되었다. 극동의 독일 해군 함정도 방어를 돕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타오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칭타오의 독일 수비군은 유럽에서 구원병력이 올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의 전례로 볼때, 이는 밝은 전망이라 할 수 없었다.

1906년 5월 24일, 베를린의 영국 해군무관 필립 두마스는 칭타오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독일을 일본의 정치적 압력에서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 전망했다. 도쿄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두마스에 따르면, 일본은 칭타오를 독일의 좋은 행동을 보장하는 인질이 될 것이었다. 베를린의 일본 해군 무관 요시로 로쿠로가 두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독일에게 칭타오 철수를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양국간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칭타오가 좋은 볼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07년 7월 19일, 두마스는 "독일 황제는 만약 일본이 이를 요구하면, 독일은 당장 칭타오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출처-

Rotem Kowner(ed.),The Impact of the Russo-Japanese War, Routledge,2007. 112-113.



덧글

  • 2019/10/09 16:27 # 삭제 답글

    저기는 결국 1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의 마수가 뻗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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