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1860년>
12월
제2차 아편전쟁, 영불연합군의 북경 점령,
영불(英佛)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을 함락하고 청 황제가 열하(熱河)로 피난을 떠난 사실과 더불어 북경조약(北京條約)이 체결된 소식이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 1860년 (철종 11년) 12월 9일에 청국에서 김경축이 긴급 보고를 조정에 알렸다. 영불 연합국의 공격에 따라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청 황제는 열하로 피난을 갔으며, 대영(영국),대불(프랑스),아라사(러시아),아미리 亞美理 (미국)의 서양 오랑캐들과 신약을 맺어 천주교 전파를 금하지 않고, 각 항구에서 자유롭게 통상하며, 배상금을 800만냥을 물게 되었다는 등의 북경조약 소식이 전해졌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곧 중신들의 회의가 열렸다.
철종이 말했다. “소식을 들으니 중국의 일이 정말 놀랍다. 대저 천하를 장악한 거대함으로도 오히려 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니 그 무력의 사나움을 가히 알 수 있다... 연경(베이징)은 우리에게는 순치 (脣齒,입술과 이)나 같은 관계이다. 연경이 위태로우면 우리나라라고 어찌 편한하겠는가. 또한 그들이 강화라고 한 조건에는 단지 교역에 관한 것 뿐만 아니다. 기독교를 사해에 전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그 해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물며 그들의 선박의 우수함은 일순에 천리를 갈 수 있을 정도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되면 장차 어떠할 것인가.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철종이 받은 충격에 비해, 영의정 조두순의 대처방안은 차라리 느긋했다. “내수 內修를 한 후에 외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내수의 방법에는 재력과 병력을 증강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구체적 방법으로 할 만한 일이 있으면 수시로 보고하겠다고 영의정이 말했다.
그러자 국왕이 “대국이 저런 곤욕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무사하겠는가?” 반문했다. 조두순은 “중국이 곤욕을 당하는 것은 천지의 운수이다.”라고 더욱 느긋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국왕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백성도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 훈계했다.
-출처
민두기(Tu Ki Min)."19세기후반 조선왕조의 대외위기의식." 동방학지, (1986), 269.
서양 오랑캐의 중국 침략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철종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었나? 국왕의 자기 수양으로 서양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나?
덧글
철종이 이정도 인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전통적인 처방을 내린 것 같은데 하필 시기가..
2.오히려 철종이 강화도령으로 생활해서 저런 도그마에 빠지지 않은 것 아닐까하는 뇌피셜이 생기네요..
3. 고종시기보다 헌종, 철종 때 미리미리 대응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저 후세인의 한탄이겠지만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