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과 영국 그리고 극동?"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19세기의 말에 왜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동맹을 구하려 했는가?

1898년은 영국 보수당의 솔즈베리 정부에게 운명의 한 해였다. 

우선, 중국 해체가 극성이었다. 3월에 독일이 교주만을 조차했고, 3월 말에는 러시아가 여순과 대련을 25년 동안 조차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5월에 영국은 웨이하이웨이 Weihaiwei를 조차, 구룡 반도를 할양했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대만 건너편의 복건성을 외세에 넘기지 않는다는 협정을 관철시켰다.

극동과는 별도로 유럽에서, 영국은 독일과 화해를 추구, 협정을 맺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을에, 영국은 수단 남부의 파쇼다에서 프랑스과 충돌했다. 파쇼다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보 경쟁의 절정을 이루었던 사건이다. 다행히도 분쟁이 잘 해결되었지만, 영국이 유럽의 대륙 세력과의 관계에서 곤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 아프리카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어, 결국 1899년 10월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보어 전쟁) 

사면초가 상태의 대영제국의 위기에 대해서, 정부 비판자들은 유럽에서의 영국의 고립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따라서, 영국 지도자들이 극동에서 문제 발생을 회피하고, 결국 지역에서 동맹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의 영일동맹)


참고-

I.H. Nish, The Anglo-Japanese Alliance: The Diplomacy of Two Island Empires, 1894-1907 (London, 1985),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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