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극동에서 영미가 협력하지 못한 이유?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티모시 쿠퍼에 따르면, 19세기말과 20세기초 중국의 혼란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현상유지 세력이 될 수 있었고,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극동에서 협력하지 못했다. 19세기 말 이후 영미관계는 앵글로-색슨 형제국가의 우애를 넘어, 20세기 영미의 "특별한 관계"의 구축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럼에도, 극동에서의 영미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우선, 미국 정치와 여론의 반영주의 때문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영국은 악당이며, 정의로운 미국이 영국과 손을 잡는 것은 불의라는 주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중국 침략의 선봉이 된 상황에서, 미국이 영국과 손을 잡는 것은 중국에서의 미국 이미지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미국 제국의 논리란, "우리는 유럽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과 손을 잡아 중국에 개입해서 미국도 영국 제국주의와 한통속 취급을 받아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미국은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 제국이었다.

다음으로, 19세기 말 영국은 제국의 과잉팽창으로 인한 후유증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보어 전쟁 등으로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지상전을 벌이는 가운데 극동에 무력으로 개입할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극동문제에는 수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방침을 영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쿠퍼에 따르면, 영미는 상호불신과 대영제국의 힘의 한계 때문에, 극동에서 효율적인 현상유지 세력이 될 수 없었다.


참고-
Timothy S. Cooper, Anglo-Saxons and Orientals: British-American Interaction over East Asia, 1898-1914, A Thesis, University of Edinburgh,2016.

- 이런 영미관계의 구도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될 것이었다. 
 
극동에서 미국은 영국과 같은 제국주의 세력 취급을 받고싶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과의 공동 개입을 미국은 주저했다.

중국 민족주의 시각에서도 영국 세력의 성격이 모호했다. 중국에서 영국 제국주의는 타도의 대상인가, 아니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협력 대상인지가 한동안 분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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