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일본의 베이징 공격을 어떻게 막았나?"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

청일전쟁의 역사에서 1894년 11월 일본이 대련과 여순을 점령한 이후, 차기의 전쟁 목표가 일본 정부의 논점으로 부상했다. 

확전론과 제한전론이 서로 대립했다. 이는 민간정치와 군부의 대립이었는데, 전자를 대표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였다면, 후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양 진영은 북경진격을 두고 갈등했다. 야마가타는 북경 진격을 주장했고, 이에 이토는 야마가타 1군 사령관의 해임을 천황에게 건의했다. 전쟁 정책 주도권을 두고 야마가타에 대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승리했다. 논란 결과,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수상 이토 히로부미와 외상 무쓰 무네미쓰 등은 이같은 확전론이 오히려 일본의 국가이익을 그르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무쓰는“자신에게 도취되어 밖의 형세를 전혀 돌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만 하는” 쓸데없는 애국심이 오히려 국가의 대계를 그르치게 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34) 수상 이토 히로부미도 신중한 입장에 서서 12월4일, 의견서를 대본영에 제출하여 발해 방면 상륙작전을 중지하고 대신 산동반도 방면의 위해위 (威海衛) 공략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아울러 타이완 점령 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토와 무쓰는 열강의 개입 위험이 높은 베이징 진격이 아니라, 그 위험이 낮은 타이완 공격을 주장했다. 일본의 베이징 점령으로 인한 청조의 몰락이 동아시아 정세에 파국을 초래할 것이며, 이는 일본의 국익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고 이토와 무쓰는 판단했다. 일본의 타이완 공격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양해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후의 청일전쟁 종전 협상에서 러시아가 청나라를 두둔하면서 개입했다. 러시아는 특히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1895년의 협상에서 러시아 정부는 4월 20일까지 강화조약이 맺어지지 않으면, 일본이 결국 베이징으로 진격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가 베이징을 노리는 일본 측에 이렇게 경고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잊으면 안 된다. 일이 그리 수월하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참고-

강성학, 용과 사무라이의 결투 -중(청)일전쟁의 국제정치와 군사전략, 리북, 2006.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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