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이토 히로부미가 야마가타의 해임을 주장한 이유?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은 모두 조슈번 출신이었다.  

전쟁의 역사에서 메이지 일본은 흥미로운 사례 두 가지를 제공했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전승국 일본 국민이 정부에 대해 폭동을 일으킨 이른바 하비야 공원 폭력 사태가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1894년 11월 승승장구하는 군대의 사령관을 총리가 해임시킨 사건이었다. 11월 29일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에게 일본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해임을 건의했다. 물론 명목은 건강상의 이유였다. (이토와 야마가타의 대립은 이후 한국전쟁에서의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과 유사했다.)

당시에 야마가타 사령관은 베이징 진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토 총리에 따르면, 베이징 공격은 청 왕조의 몰락을 재촉할 것이며, 내전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서구 열강의 빠른 개입 위험을 높일 수 있었다. 이토는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일본은 중국과 평화협상이 아니라, 서양 강대국과 협상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따라서 일본의 민간 지도자들은 만약 야마가타가 전장에 잔류하면,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베이징 진격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쇼와 시대 일본 육군이 '통수권 독립' 논리로 1930년대에 막가파식으로 행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전쟁전략에서 이토 총리가 야마가타 장군에게 승리한 것은 일본 대전략의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해군전략이 보다 강조되었다. 이후의 일본 전쟁 활동은 해군력의 중요성이 지배적이었다. 제해권 없이 일본은 마음대로 군대를 배치할 수도 보급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중요한 전쟁 목표는 중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키고, 중국이 일본의 중요한 해상선에 더 이상 위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해상선은 전시에는 군사력 투입에, 평화시에는 국제 무역을 하는데 중요했다. 

이토가 전쟁 정책 주도권을 잡은 이후 베이징은 더이상 일본군의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에 일본군 제2군은 잔류 북양함대의 본거지인 웨이하이를 차지하려 했다. 이는 베이징을 직접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군력 없이 중국은 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약한 세력이 될 것이었고, 일본은 지역에 주요 해군력 강대국이 될 것이었다.

베이징 대신에 이토와 그의 외상 무쓰가 목표로 삼은 것은 타이완이 될 것이었다.


참고-

S. C. M. Paine, The Japanese Empire: Grand Strategy from the Meiji Restoration to the Pacific War, 34-35.

이토와 야마가타의 갈등은 근대 일본의 대전략의 두 경향의 갈등을 의미했다.

해양주의 대 대륙주의, 해군 대 육군, 북수남진 대 북진남수, 민간정치 대 군국주의의 대립.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본이 한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침략주의의 방향이 만주와 중국 본토를 향하는 대륙주의로 확정된 것은 여전히 아니었다. 

전쟁 말기에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것은 해군 주도의 남진주의가 여전히 일본 제국의 대전략의 선택지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륙주의가 해양주의에 완승을 거둔 것은 언제부터인지가 궁금해진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