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조선에서의 반중주의 反中...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김정기에 따르면, 1880년대 조선에서 반중의식이 만연했다고 한다.

[반중의식] 

1880년대, 1890년대 사료의 바다에 그물을 드리우면, 아무 곳에서나 걸려드는게 반청 자료이며, 청의 속방화 屬邦化 정책은 추진 초기부터 그 추진현장에서 예외없이 민의 반중(반청)의식을 촉발하는 매체로 작동하고 있었다. 가령, 청국 군대의 남양만 상륙 때의 행패와 대원군 납치가 그 대표 사례였다. 특히 1885년 이후 확산된 청상인의 침투는 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사적 의미, 서경, 2002, 37.

- 당시 조선에 상주했던 원세개는 고종을 마치 부하처럼 다루는 갑질을 일삼았다.

-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중국인 비하표현 "짱깨"라는 말의 기원이 바로 이 때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짱깨는 중국어로 "장꾸이", 즉 사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에 중국 사람이 조선으로 와서, 사장 행세를 하는 것은 중국요리집 밖에 없으므로,

짱깨는 처음 조선에 와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중국요리집 사장을 부르는 말이 었다가, 이것이 지금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 근대 한국인의 반중의식은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과 이에 따른 한국에서의 중국 배척운동에서 확인되었다.

만보산 사건이란, 

 1931년 7월 2일에 중국 만주 지린 성 창춘 현 싼싱바오(三姓堡)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한국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였다. 

만보산 사건 소식이 전파되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이 참가하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동아일보》 등의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진정되었으며, 이후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화교 활동이 가장 미약한 나라가 된 것은 개항기의 반중주의와 관련이 있는가?



덧글

  • 함부르거 2019/06/15 08:57 # 답글

    저의 어머니의 할머니, 그러니까 외증조할머니께서도 '일본놈보다 중국놈이 무섭다'고 손주들에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사셨던 분들에게 반중감정은 굉장히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 파리13구 2019/06/15 10:12 #

    제보 감사합니다.
  • 나인테일 2019/06/15 17:53 # 답글

    그 뒤로 오족협화 만주국이라는 프로파간다도 있었죠. 개항기는 그냥 하나의 단면일 뿐이고 좀 더 많은 측면을 봐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 포스21 2019/06/15 18:55 # 답글

    반중감정은 대략 삼전도 치욕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청난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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