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황도파와 해군 함대파의 관계?"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일본군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아라키 사다오의 육군 황도파와 가토 간지의 해군 함대파의 궁합이 맞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육군과 해군의 각 파벌은 1930년대 초에 부상했다. 두 파는 이른바 "1936년 위기설"을 주장했다. 런던 해군 조약이 재협상되는 35년-36년에 일본에 대외적인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아라키의  1936년 위기론 "Crisis of 1936" - 아라키가 36년 위기설을 주장한 것은 바로 그 해에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며, 동시에 영미와의 해군 조약이 만료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라키는 서양과 타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소련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KOVALIO, JACOB, ARAKI SADAO, JAPANESE ARMY FACTIONALISM AND THE SOVIET UNION, PhD thesis, University of Pittsburgh, 1981. 139.]

하지만 함대파의 36년 위기론은 다른 주장을 했다. 워싱턴 해군 조약의 파기로 미국 혹은 영미와의 전쟁 위기가 발생할 것이고, 이를 위한 해군 군비증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육군 황도파가 반발했다. 해군 때문에 육군의 소련과의 전쟁 준비 예산이 낭비된다는 것이었다. 가령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는 "미국과의 경쟁은 관리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미국과 결국 전쟁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1934년 봄, 육해군 회의에서, 육군은 해군을 설득하려 했지만, 해군은 해군 군축 조약 탈퇴도 불사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참고-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Naval Inst Pr; 1st edition (September 1, 2006)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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