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런던 해군조약 이후 조약파의 피바람?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30년 런던 해군조약 관련 논쟁에서 함대파에 대해 조약파가 승리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투에서 이긴 것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결국 함대파였다.

우선, 조약 체결과 더불어, 해군성의 조약파 핵심이 좌천당했다. 해군성의 해군 부대신 야마나시 가쯔노신(山梨勝之進)은 해사를 2등으로 졸업한 수재였고, 탁월한 행정가였다. 야마나시는 해군대신 다카라베가 런던에서 협상할 동안, 국내에서 조약 체결 성사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조약 반대파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런던 회의 이후, 도쿄 경시청의 한 당국자가, “당신은 내가 제일 걱정할 정도로, 암살이라는 신체적 위협에 노출되었다. 당신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실로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야마나시와 더불어, 해군성 군무국장 호리 데이키치도 조약 성사를 위한 논리를 제공했다. 호리에 따르면, 군비에 대한 결정은 예산 문제이며, 정부의 일원인 해군대신이 결정할 문제였다. 즉 가토 간지의 해군 군령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런던 조약 이후 해군성의 조약파 핵심 2인방은 불운을 당했다.  야마나시는 사세보 해군 기지로 발령을 받았고, 호리 테이키치는 제3 소함대(전대) 사령관 第3戦隊司令官으로 좌천되었다.

1930년 11월 14일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런던 조약 비준을 위해 노력한 하마구치 총리가 도쿄 역에서 저격을 당했다. 저격범은 사고야 도메오.  런던 조약에 대한 분노가 범행 동기였다.

런던 조약의 조약파의 마지막 희생양은 1936년 2월 26일 반란사건의 해군 3인방이었다. 즉 육군 황도파 암살이 표적이 되었던 해군 원로3인방, 스즈키 간타로, 오카다 게이스케, 사이토 마코토는 온건파로, 런던 해군조약을 지지했다. 그들이 36년에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 


참고-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Naval Inst Pr; 1st edition (September 1, 2006)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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