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제1차 세계대전을 유럽 현지에서 목격한 일부 일본 육군 무관들은 일본의 개혁을 주장했다. 1917년 네덜란드 주재 무관이었던 와다나베 조타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와타나베 죠타로(渡辺錠太郎)는 “현 전투방법은 지나친 공격정신의 오용에 따라 무모한 돌격의 정신만능주의에서 오는 육탄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전쟁의 실상은 “포병과 기관총의 유효사정거리의 화력 앞에서 보병은 밀집대형을 유지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와 같은 전쟁 시찰단의 보고서 등을 통해 일본 육군 역시 보병 전투에 있어서 기관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소총 위주의 밀집 돌격은 강력한 화력 앞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25년 육군대학교 교장, 30년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1935년 육군교육총감이 되었다.
와타나베는 통제파의 중견 장군이 되었다. 그는 일종의 개념 군인? 으로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불운은 육군의 3대 고위직인 교육총감 전임자가 바로 황도파의 보스인 마자키 진자부로였다는 점이다. 마자키를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와타나베는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기다린 운명은 바로 36년 2월 26일 사건이었다. 그 날 아침, 육군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渡辺錠太郎 Inspector General of Military Education 는 다카하시 다로 소위 지휘하의 병력의 공격을 받아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참고-
심호섭, "왜 일본 육군은 단기결전, 백병돌격으로 나아갔는가?", 군사/-(86), 2013.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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