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포병(화력)을 무시했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을 돌격주의를 강조하며, 화력주의를 경시했다. 그 희생양은 일본포병이었다. 


1920년대 일본 육군은 우가키 군축을 계기로, 사단의 수를 줄이는 대신에 군의 기계화,근대화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는 제1차세계대전의 교훈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무기와 장비를 적당히 교체하는 선에 그쳤다.


군축 후에 일본 육군 1개 사단당 포병밀도 (사단의 야포산포의 수)는 러일전쟁의 개전 당시보다도 낮았고, 여전히 경포주의(輕砲主義)를 고집하고 있었다. 군축 후 포병밀도가 가장 높았 던 시기조차 야포는 1개 사단당 평균 47문으로 러일전쟁의 개전 당시인 54문을 밑돌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은 전장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고, 각국은 고성능 유탄포와 캐논포의 개발대량 배치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크게 격차가 벌어졌던 일본 육군이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포병의 강화에 착수해야 했다. 그러나 경비가 많이 드는 포병은 야마나시 군축에서 첫 번째 정리 대상이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의 포병을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4.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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