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육군 수뇌부에서 황도파가 제거된 것은 일본의 대륙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936년 2월 26일 사건이 성공했다면, 37년의 중일전쟁은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 존재한다.
사건을 주도한 황도파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몰두했다. 따라서 쇼와유신에 성공한 황도파는 러시아와의 대결을 위해서, 중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당대의 일본 극우파 활동가 고마다 요시오에 따르면, 혁명의 성공은 친중파 기타 잇키를 지배층에 편입시켰을 것이며, 기타는 중국과의 어떤 전쟁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다마는 "쇼와 유신의 국내개혁이 군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성공했다면, 일본은 빠른 시일 안에 철저한 민족주의 체제가 되었을 것이고, 도조 히데키와 같은 군사 독재체제가 10년 일찍 등장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기타 잇키가 실제로 전통 지배세력 보다 덜 극단적인 외교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기타 잇키는 일본의 국가 독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백만장자인 대영제국과 땅부자인 소련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
Storry Richard. "Japan in the Thirties :Headless fascism from below and from above", in Ian Nish (ed.), Collected Writings of Richard Storry, 2002. 117.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