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청년장교들의 천황 숭배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맹목적 짝사랑이었는가?
1930년대 일본 육군의 급진주의 우파 청년장교운동은 "존황토간 尊皇討奸 Sonnō Tōkan" “Revere the Emperor—Eliminate the Evils"을 주장했다. 즉 즉 천황을 받들어, 사악한 무리들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쇼와유신은 천황의 직접 통치를 의미했다.
하지만, 청년장교의 천황 숭배는 짝사랑이었는가? 천황은 청년장교 운동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황도파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가 통제파 지도자 나가타 데쓰잔 Tetsuzan Nagata을 그의 사무실에서 일본도로 잔인하게 죽이자, 천황은 혐오감을 표명했다. 천황은 신임 육군대신 가와시마 요시유키에게, “이 청년들이 지나치다. 나는 그대가 이를 끝장내기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1)
이렇게 자신들의 맹목적 충성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청년장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청년장교 운동의 분수령인 1936년의 2월 26일 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청년장교들이 천황이 그들에 반대하며, 국가개혁에 반대함이 분명해지자, 핵심 가담자 이소베는 감옥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 천황 폐하, 국정을 정말 이렇게 형편없이 다루실 것입니까? 만약 폐하가 이 길을 더 걸어 가신다면, 폐하는 신의 분노를 일으킬 것입니다. 폐하는 천황이지만, 만약 신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폐하는 천황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2)
1) Shillony, Ben-Ami. Revolt in Japan :the young officers and the February 26, 1936 incident. Princeton University Press , 1973, 109.
2) 같은 책, p.109.
덧글
처형 소식을 들은 히로히토의 심중에 대한 기록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괘씸한 놈들, 내 예상이 맞았어' 정도 아니었을까요..
지치부는 기타 잇키의 수제자 니시다 미쓰기의 육사동기로, 청년장교 운동 지지자였습니다.
2.26 사건도 흐름을 읽다보면 천황 입장에서 끔찍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천황이 침착한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하여튼 이게 왜 황도파냐, 도조 히데키는 왜 통제파냐 , 이해가 안됐기 때문에
일본 전쟁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