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육군의 하극상과 히로히토의 우유부단?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히로히토와 일본 육군은 제국 패망의 환상의 궁합이었는가?

1931년 만주사변 발발과 더불어, 관동군과 육군 중앙의 일부 세력의 하극상이 문제가 되었다. 도쿄의 중앙정부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시데하라 기주로의 도쿄가 끊임없이 전쟁 불확대 원칙을 주장했지만, 관동군은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하에 독단적으로 행사했다. 심지어 일본군 통수권 주체인 천황의 히로히토의 방침도 무시되었다. 

하극상,군기문란 현상에 대해서, 통수권자인 천황 히로히토가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해야 했지만 그는 무능했고, 우유부단했다. 

미국 국무장관 스팀슨을 결정적으로 분노하게 만든, 1932년 1월  3일의 관동군의 금주 점령을 보아도, 히로히토의 우유부단을 잘 보여준다.

1931년 12월 중순부터 도적 소탕이라는 명분 하에 관동군이 금주 공격을 주장했다. 12월 23일, 히로히토가 총리 이누카이에게 금주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전하고, “국가간의 신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1) 천황의 방침은 바로 당일에 무시되었다. 23일, 관동군이 금주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날인 24일, 심지어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는 관동군 증원을 요구했고, 내각이 이를 승인했다. 

그러자 12월 27일에 히로히토는 이누카이에게 재차 경고했다. 천황의 시종무관장 나라 다케지의 일기에 따르면, 천황이 이누카이에게, “금주 공격이 끼칠 대외 영향이 심히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관동군은 금주 점령을 강행했다. 2) 

12월 28일
제2사단이 금주를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결국 32년 1월 3일에 일본군이 금주를 점령했다.

그렇다면, 통수권자인 자신의 방침을 어기고 금주를 무단으로 점령한 관동군에 대해서 히로히토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1월 4일,
그러나 일단 금주에 일장기가 휘날리자 히로히토에게서 그러한 불안은 사라졌다. 1932년 1월 4일, 히로히토는 자신의 뜻을 전하고자 모든 군인에게 「군인칙유 50년 기념일에 육해군에 내리는 칙어」를 발포하고, 그 의미를 숙고하도록 했다. 실제로 이는 매우 온건하게 돌려서 훈계하는 내용 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흘 후 히로히토가 공표한 「관동군에 내리는 칙어」 는 참모총장 간인노미야의 권유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관동군이 “자위” 수단으로서 중국의 “비적”과 용감하게 싸워 “황군의 위력을 나라 안 팎에 선양”했다며 통제에 복종하지 않는 관동군을 칭송했다. 이 칙어는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널리 전해져,전쟁에 선뜻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이것이 육군의 군기를 바로잡으려는 이누카이의 노력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3) 

30년대 이후 태평양전쟁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견제의 시작을 알린 스팀슨 독트린이 나온 것은 1월 7일이었다. 스팀슨 독트린이란, 일본이 무력으로 만주 상태의 현상을 변경한 것을 미국정부가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한 것이었다. 
 
육군의 하극상과 천황 히로히토의 우유부단의 기묘한 결합은 

만주사변 이후 히로히토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1)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 283.

2)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 283-284.

3)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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