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황도파는 파시스트 세력과 투쟁했는가?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30년대 일본 육군의 주요 지도자, 아라키 사다오, 마자키 진자부로,나가타 데쓰잔,도조 히데키를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인식의 한계는 무엇인가? 

1930년대 일본 육군 역사는 아라키 사다오,마자키 진자부로의 황도파와 나가타 데쓰잔의 통제파의 파벌 싸움으로 전입가경이었다.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은 1935년 7월 15일, 마자키 진자부로가 일본 육군의 3인방 보직인 교육총감 직에서 해임된 사건이었다. 육군대신 하야시 센주로와 육군성의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이 마자키에게 빅엿을 먹인 셈이었다.

마자키는 순순히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황도파 세력과 청년장교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전개했다.  마자키는 자신의 해임을 육군성의 “파시스트” 정책을 반대한 탓으로 돌렸다. 1) 마자키는 통제파의 나가타 데쓰잔을 독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파시스트”로 간주했다. 2) 문맥상으로만 보자면, 마자키는 국체명징 國體明徵 을 위해서, 나가타라는 독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파시스트와 투쟁을 하다가 불이익을 받은 셈이었다. 마자키가 천황을 위한 국체명징을 통해 일본적인 전체주의를 주장했다면, 통제파의 나가타는 독일적인 총력전 사상을 통해 파시즘을 주장한 것인가? 이렇게 1935년 여름의 일본에서, 마자키의 국체명징 전체주의와 나가타의 파시즘은 대립한 것인가?  
 
마자키의 "반-파시즘론"??은 곧 동조세력을 발견했다. 1935년 7월 초, 육군사관학교 사건의 무라나카와 이소베, “육군 정화에 대한 의견“ "Views on the Housecleaning of the Army"이란 유인물을 작성했다. 그들은 육군의 중앙 지휘부에 3개의 파벌이 존재했음을 주장했다. 통제파, 정화파 the purification group , 아라키파. 그들은 앞의 두 파벌이 아라키파에 대한 공격에 공조하며, 국가재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인물은 나가카 데쓰잔을 1931년 3월 쿠데타 음모의 수괴로 비난했고, 이는 황도파 지도자 마자키 진자부로의 입장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가타가 ”사악한 천재“이며, 마자키 장군의 제거에 책임이 있으며, 파시스트 정책을 몰아붙이면서 일본 육군을 국체원리(천황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말하자면, 나가타의 ”파시즘“이 국체명징 國體明徵 (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는 국체를 명확하게 드러내자는 주장)에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3) 

나가타 데쓰잔에게 이 유인물은 사실상의 사형선고가 될 것이었다. 

1) Crowley, James, Japan’s Quest for Autonomy: National Security and Foreign Policy, 1930-193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6. 265.

2) Hugh Dyson Walker, East Asia: A New History, AuthorHouse (November 20, 2012), 542.  

3) Crowley, James, Japan’s Quest for Autonomy: National Security and Foreign Policy, 1930-193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6. 266.

독일 파시즘과 일본 파시즘은 같은 것인가?

1930년대 일본을 파시즘 사회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마자키와 나가타의 충돌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아라키와 마자키의 황도파는 파시즘의 본류인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는 일본 파시스트 나가타 데쓰잔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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