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1893.07.09~1972.06.05).
다나카 류키치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2-26사건의 배경에는 일본 육군 내부의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나카에 따르면,
1) 황도파를 주도한 것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자키 진자부로였고, 통제파는 나가타 데쓰잔, 우메즈, 도조 히데키가 주도했다.
2) 황도파 지지자들이 일본의 독특한 정신과 상무적 가치를 강조했다면, 통제파는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다.
3) 비합리적인 황도 독트린이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1932년 암살에 가담하게 했다면, 통제파 청년장교들은 1931년의 3월과 10월의 쿠데타 같은 방법을 선호했다.
4) 육군대신 하야시와 국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휘하의 통제파 득세가 1936년 2월 26일 반란을 촉발했다.
5) 36년의 2월 반란으로 황도파 핵심 장군들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다.
6) 이후 통제파가 육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부를 통제하며, 일본을 파시즘을 향해 이끌었다.
James B. Crowley's Japan's Quest for Autonomy: National Security and Foreign Policy, 1930-1938 (1966) ,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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