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아라키 사다오
Araki Sadao (1877–1966)
그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었으며, 이후 극우 민족주의 정치 이론가로 활동했다.
전쟁 전 일본 육군은 아라키 사다오를 중심으로 한 "정신력"을 강조하는 세력과 나가타 데쓰잔의 "총력전파"가 대립했다. 아리키의 황도파와 나가타의 통제파의 갈등의 철학적 배경에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
아라키는 장군이자 정치가로, 1930년대 동안 군과 사회의 정신적 동원을 주장했다. 도쿄 태생의 아라키는 육사를 졸업하고 1907년에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위 계급으로 러일전쟁에 참전,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 동안 러시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러시아 체류 동안, 그는 러시아 혁명을 경험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원정 동안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 파견되었고, 이를 통해 아라키는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본국에 돌아온 아라키는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헌병대장, 육군대학 총장, 참모본부 국장, 육군 교육총감 그리고 육군대신 (1931-1934 : 이누카이 츠요시, 사이토 마코토 내각)
육군대신으로 아라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육군을 개혁하려 했다. 육군 중앙 지휘부에서 총력전을 주장하는 자들 (나가타 데쓰잔)을 숙청했다. 그들 대신에 아라키는 본인 처럼, 일본의 정신이 전쟁 물자 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중용했다. 그와 그의 추종세력은 육군 교본을 다시 쓰고, 정신과 사기를 강조했고, 특히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공격 정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육군대신일 동안 아라키는 "천황의" 라는 표현을 강조했고, 가령, 육군을 황군이라 불렀고, 육군을 천황제의 간성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육군 장교들이 사무라이식으로 칼을 차게 만들었다. 이렇게 아라키와 그의 추종세력은 황도파 the Imperial Way faction (Kōdōha)라 불리게 되었다.
1934년 육군대신에서 물러난 후, 아라키는 군사참의관회의 軍事參議官會議 the Supreme War Council 위원으로 활동했다.
운명적인 1936년 2월 26일 사건을 앞두고, 아라키는 반란군 장교들을 만났고, 그들의 대의를 지지했다. 반란세력은 아라키를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그들을 반란세력으로 규정했다. 반란에 동조했던 아라키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진압할 것을 주장했다. 반란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그는 사건 이후 예비역이 되었다.
아라키는 1938-1939년에 정부로 복귀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히라누마 내각에서 교육부 장관이었다. 1939년 그는 정신 동원을 위한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종전 이후, 아라키는 체포되어, A급 전범 판결을 받았다. 1936년 2월 반란에 연루된 것이 부분적 이유가 되었다. 그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1954년 병으로 석방되어, 이후 사면을 받았다.
그는 1966년 11월에 사망했다.
출처-
Japan at War: An Encyclopedia. Contributors: Louis G. Perez - Editor. Publisher: ABC-Clio. Place of publication: Santa Barbara, CA. Publication year: 2013. Page number: 18
덧글
특히 논리구사에 능했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