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소련의 극동전략과 손문?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20년대초 손문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외세의 지원을 원했지만, 그 노력은 늘 실패했다. 이러한 고립무원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바로 레닌 사망 직후의 소련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1930년대 후반에도 반복되는데, 장개석이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수난 중일때, 그의 최대 후원 세력은 스탈린의 소련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아직 중국혁명의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 전의 손문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너선 스펜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923년, 광저우의 군사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쑨원은 원조가 필요했으며 소련은 기꺼이 이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 배후에 있는 전략적 사상은, 세계혁명을 자극하려는 욕망과 자국의 국경선을 안전하게 보장받으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소비에트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이미 19〇4~1905년 전쟁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소련의 남쪽국경인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가고 있던 철저한 반공 反共 사회인 일본임이 분명했다. 쑨원은 만주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주요 연결로가 되는 동청철도를 중•소 합작으로 경영하는 데 지원할 것을 표명했다. 결국 일본의 야망을 제지할 만큼 중국이 강력해지는 것이 소련에게 유리했다. 동시에 소련은 베이징 정권과 북부의 다른 군벌들과도 외교협상을 계속하여 1924년 초에 중국의 외교적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소련의 관찰자들은 화북에 국가를 통일시킬 만큼 강력한 인물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게다가 돤치루이를 통 한 일본의 책략과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중국이 결국 일본의 노예가 될 운명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또한 소련은 당시에 중국 공산당 세력을 믿을 수 없었다. 1923년까지 중국 공산당은 아직도 형성단계에 있었고, 국가를 이끌기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출처-

조너선 스펜스, 현대중국을 찾아서 1, 이산, 1998. 39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을 둘러싼 국제질서는 1922년의 워싱턴 조약파와 소련의 대립에 의해 규정되었다.

미국,영국,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워싱턴 세력은 21-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소련을 배제시키고, 극동에서의 새로운 질서 형성을 모색했다. 하지만,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서 중국의 손문에게 접근, 중소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극동에서의 소련 권익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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