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전후 유럽의 대륙질서를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협화음의 원인은 동유럽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에서 기인했다. 프랑스는 독일 견제를 위해서 동유럽의 신생 국가들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동맹을 통해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봉쇄선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의 시각은 달랐다. 영국은 동유럽에 대한 베르사유 조약의 처리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영국은 동유럽의 신생국들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기피했다. 왜냐하면 이 동맹 때문에 영국이 잘못된 문제에서 기인하는 전쟁에 휘말리게 될 수 있고, 잘못된 나라들의 방위에 나서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 "영국인들은 폴란드 혹은 북부 슐레지엔의 단치히 때문에 발생하는 분쟁에 개입할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유럽의 이 지역 주민들이 불안정하고 흥분을 잘 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느 때이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분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국 지도자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하려 했고, 동유럽 안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영불 동맹을 고려하지 않았다.
출처-
Kissinger,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1994),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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