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일본 화해의 발목을 잡은 것은 소련이었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30년대의 영국은 국방과 재정이라는 관점에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일관계는 이미 양국관계의 수준을 넘어선, 세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영일화해의 좌절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중국,미국,소련이 이 문제에 촉각을 세웠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중국 침략을 노골화한 상황에서 영일의 거래는 중국을 희생시킬 것이 분명했고, 이는 20년대의 워싱턴 체제의 수호자 미국을 화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벨기에에 대해서 그렇게 했듯이, 중국의 주권 수호와 영토 보존은 미국의 극동정책의 주요 관심사였다. 만약 영일 화해가 중국의 영토보존이라는 미국의 원칙을 침해한다면, 영미관계가 손상될 것이었다. 

1934년 3월, 영국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이 영국-일본 불가침조약을 제안했다. 그러자 그의 동료인 외무장관 사이먼이 중국,러시아,국제연맹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영일 조약이 의미가 있으려면, 일본이 워싱턴 해군 군축협정의 무력화 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억지력에 담보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영일 화해의 전망은 1934년 4월의 이른바 아모 독트린으로 위축되었다.  일본 외무성 대변인 아모 에이지가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가진다고 선언했다. 일본제국은 따라서 다른 외세의 중국 개입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1934년 말에 불가침 조약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고, 일본이 해군 군축 비율에서 전향적인 자세로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의 주장에 따르면, 조약은 일본의 침략을 부채질 할 것이며, 이에 대한 영국의 반대를 어렵게 마들 것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육군 대신 아라키 사다오의 주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일 불가침 조약 덕분에, 일본은 소련 공격을 결심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독일에 대한 소련의 견제력이 제거될 수도 있었다.  만약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 침략 방향을 남방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아모 독트린 이후, 영일 불가침 조약의 조항에 중국에서의 일본의 침략을 견제할 조항의 삽입이 어려워 진 것도 조약의 성사를 방해했다. 일본은 중국 문제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11월에 일본은 영일 불가침 조약을 거절했다.

조약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1935년의 해군 협정 협상 당시였다. 하지만  조약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해군협정에서 영국과의 해군력 증강의 동일 비율 주장을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1936년 10월, 신임 런던 주재 일본 대사가 된 요시다 시게루가 영불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장애물은 분명했다. 영국은 중국에서의 침략자 일본에 대한 후견국이 될 수 없었다. 그랬다면, 국내의 반일여론과 미국과 세계 여론이 영국을 비난할 것이었다.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중국에서의 영국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중국은 일본에게 깨기에는 너무 큰 호두가 될 것이었다. 또한 일본과의 협력으로 영국은 러시아를 화나게 만들 것이며, 나치 독일에 대한 소련의 견제력을 고갈시킬 수도 있었다.


참고-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108.  


결국, 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유화정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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